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27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예천권씨 초간정 草澗亭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350(용문경천로 874)에 대구부사大丘副使,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를 역임하고 초간일기草澗日記 등 문집을 남긴 권문해權文海(1534~1591)가 49세 때인 1582년에 창건하고 도승지 박승임朴承任이 초간정사草澗精舍라고 현판을 써서 걸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626년에 아들 죽소공竹所公이 초가집 몇 간으로 다시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붕괴 되었다. 그후 1739년 세 번째로 세운 것이 현재의 모습을 한 초간정이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174m, 좌표는 36°42'05"N 128°22'55"E를 가리킨다. 초간정草澗亭은 금곡천金谷川이 바위를 만나 휘돌아 가는 계곡의 상부에 위치하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은 개천으로 바로 떨어지도록 설계를 했다. 초간정草澗亭을 ..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함양박씨 영사정 永思亭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352(금당실길 127)에 함양박씨 금당 입향조 박종린(1496~1553)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추원재 옆 영사정永思亭은 그 후손들이 1940년에 세운 정자이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141m, 좌표는 36°41'38"N 128°246'31"E를 가리킨다. 영사정永思亭은 입향조 박종린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금당실의 함양박씨 문중 사람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정자이다. 건립 내력과 취지를 담은 영사정기에 의하면, 정자의 이름은 『시경』 대아大雅 하무 편의 永言孝孝思維(길이 효도할 마음을 생각하니, 효도하려는 생각이 준칙이 됨이라)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영사정의 건물과 담장 등의 모양을 보면, 상주에서 박눌이 다섯 아들을 공부시켰던 모정과 유사하다. 이는 벼슬에 올랐지만 뜻을 이..

합천 삼가 외토리 남명의 수행처 뇌룡정 雷龍亭

합천 삼가면 외토리 46번지 위치했던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9호인 뇌룡정雷龍亭을 2013년에 양천강 정비 사업으로 지금의 외토리 618-1번지로 옮겨 지었다. 이때 문인송은 조경업자에게 팔았고 느티나무는 잘라버렸으며 서어나무는 그냥 두었으나 지금은 고사해서 버섯이 돋아있다. 문화재의 관리가 이런 정도라면 경상남도의 문화재 담당은 역사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 문화재란 그 장소에 위치해 있을 때 역사가 되는 것이지 옮겨버리면 그 가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백여년이나 뇌룡정과 함께해 하나의 풍경이었던 나무들을 훼손해 없애는 것은 문화에대해 문외한門外漢이 하는 짓이다. 그런 짓을 합천군과 경상남도, 인천이씨들이 합작해 훼손한 것은 이씨들은 조상을 모독한 것이고 공무원은 무뇌無腦란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의령 정암루

함안 월촌리 정암에서 남강을 넘어 의령으로 진입하는 남강변의 우뚝 솟은 봉우리 정상에 위치한 정암루鼎巖樓는 1978년 중수했다. 정암루 내부에는 당시 군수 정계수鄭桂守가 중건기문을 짓고 남상구南相九가 글씨를 쓴 중수기가 걸려있다. 정암루 아래의 남강에는 우리나라 3대 부자가 탄생한다는 솥바위鼎巖가 있어 유명해 졌는데 이곳이 옛 정암진 나루이다. 이 정암진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을 이끌고 갈대 사이에서 강을 오르던 왜구들과 전투를 벌여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곳이다. 정암루중건기 鼎巖樓重建記 산과 물이 어울리는 곳에 絶勝이 많으나 鼎岩같이 생김이 奧妙하고 秀麗한 곳은 찾기 어렵다. 이 고을 眞山인 闍崛山 뫼줄기 東으로 내려와 龜龍山에 봉우리 짓고, 숨이 차서 智異山 흘러온 南江물을 ..

진동면 태봉리 하산조씨 광양재 匡陽齋

진동면 태봉리 397(태봉1길 358-9)에는 하산조씨夏山曺氏(창녕조씨) 임난선무원종공신壬亂宣武原從功臣인 조명봉曺鳴鳳을 기리는 광양재匡陽齋가 있는 곳이다. 구글지도는 위도 35°09'26.3"N 경도 128°30'13.8"E를 가리킨다. 대문에는 죽간문竹澗門이라 편액 했고, 본당은 광양재匡陽齋라 편액 했으며,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대청마루 위에는 이우섭李雨燮이 쓴 광양재기匡陽齋記와 조희태曺熙台의 원운原韻 및 조규형曺圭馨의 차운次韻 등이 있으며 좌우의 방에는 영사실永思室 화수헌花樹軒의 편액이 걸려 있다. 柱聯 壟雲瞻望倍增感慕 구름 낀 언덕 아득히 바라보니 사모함이 배나 더하고 古里來梓必恭敬止 옛 마을 가래나무 찾으니 반드시 공경하게 되네 百源孝水涓涓不渴 백가지 중 근본인 효는 졸졸 흐르는 물처럼 나오지..

구산면 구복리 김녕김씨 영사재 永思齋

구산면 구복리 111(구복길 37-31)에는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재실인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구글지도에서는 「위도35°04'14.1"N 경도128°34'07.9"E」라 표시한다. 이곳 영사재永思齋는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현손玄孫으로 임진왜란의 공으로 군위현감軍威縣監을 지냈던 김승전金承田의 셋째 아들인 재성再成이 밀양에서 이곳 구복龜伏으로 이거하여 300여년이 넘도록 살아온 세장지世庄地이다. 대문에는 념수문念修門이라 편액 했고, 재실齋室에는 영사재永思齋라 했으며, 4개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고 문미門楣에는 죽계竹溪 안용호安龍鎬가 쓴 영사재기永思齋記가 걸려있다. 永思齋記 義昌治南一舍許 龜山面背山而案海 有坊焉者 曰龜伏 曠如奥如泉甘土肥佳氣扶 與卽金寧金氏世庄也 而甍簷翠飛棟宇 輪奥掩映於雲烟之際者 其先世墳菴也 十代冑..

진주 대곡면 덕곡리 전주이씨 송월정 松月亭

대곡면 덕곡리 670(마진한실로 11)는 남강이 용트림을 하듯 흘러오다 진성면과 대곡면을 가로 지르는 곳에 혈을 맺었다. 그곳에 전주이씨의 오당吾戇 이인첨李寅瞻과 남하南下 이두빈李斗贇을 기리는 송월정松月亭이라는 정자亭子를 마련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44m로 표시하고 「위도35°13'28.2"N 경도128°11'55.4"E」라 표시한다. 송월정 앞에는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 343cm, 나이 150년 정도의 팽나무 노거수가 우뚝 서 있어 자전거 동호인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송월정의 좌측에는 『완산이진선처유인김해김씨렬행비完山李震善妻孺人金海金氏烈行碑』가 비각에 모셔져 있다. 솟을대문에는 숭모문崇慕門이라 편액했고 본정에는 송월정松月亭이라 편액했다.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으며, 마루 ..

구산면 구복리 나주임씨 모연재 慕蓮齋

구산면 구복리 100(구복길 34)에는 귀래정敀来亭 임붕林鵬¹⁾의 후손들이 지은 모연재慕蓮齋라는 이름의 재실이 있다. 이곳을 구글지도는 위도 35°04'13.4"N 경도 128°34'03.5"E를 가리킨다. 대문에는 무두문無斁門이라 편액 했고 본당은 모연재慕蓮齋라 했으며, 재실 안에는 근파槿坡 안종희安鍾禧가 찬한 모연재기慕蓮齋記가 걸려 있고 후손 임종수林鍾秀가 지은 모연재상량문慕蓮齋上樑文이 걸려 있다. 또한 후손 임영택林永澤이 지은 모연재원운慕蓮齋原韻이 있고 기둥에는 주련이 있다. 아래에는 모연재기慕蓮齋記를 옮겨 둔다. 【주석】 귀래정敀来亭 임붕林鵬¹⁾ : 임붕林鵬(1486~1553)은 조선전기 예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1552년(명종 7)에는 광주목사를 역임했다. 기묘사화에 조광조(趙光..

내서읍 재령이씨 광음재 匡陰齋

내서읍 삼계리 1275-6(삼계로 268)에는 재령이씨의 재실인 광음재匡陰齋가 있다. 이곳은 해발 123m라 기록하고 위도 35°14'30.5"N 경도 128°28'53.5"E를 가리킨다. 이곳 광음재에는 광심정廣潯亭과 지직재志直齋를 모시고 있으며 옛 목조건물은 남루하여 철거하고 2015년 8월에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었다. 대문에는 사속문似續門이라 편액 했고 본당은 광음재匡陰齋라 이름했다. 방문했을 때 내부를 보지 못해 기문은 볼 수 없었서 『마산문화지』에 기록되어 있는 광음재기匡陰齋記를 옮겨 둔다. 사속문似續門 편액과 광음재匡陰齋 편액 및 주련은 백당白堂 정기헌鄭基憲(1886~1956)의 조카인 관재貫齋 정문석鄭文錫(1905-1997)이 쓴 글이다. 匡陰齋記 匡廬山在咸安郡東南隅 最爲秀麗 一支北走 爲山..

구산면 수정리 전주이씨 숭모재 崇慕齋

구산면 수정리 954(수정4길 41)에 위치 하는 전주이씨 숭모재崇慕齋는 가선공嘉善公 이제인李齊麟이을 향사하는 재실이다. 임곡산荏谷山 아래 자리한 이곳은 구글지도에서 「위도35°11'75"N 경도128°57'81.3"E」을 가르킨다. 『마산문화지』에는 숭모재崇慕齋의 사진을 잘못 넣어 두어서 2020년 2월 2일에 탐방을 하고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고 숭모재崇慕齋의 건물이 이 사진 속의 건물임을 확신하게 됐다. 당시에 숭모재崇慕齋에는 기문記文이 걸려 있지 않아 내용을 몰랐는데 그 기문을 아래에 옮겨 둔다. 崇慕齋記 五世則禮當裰忌祭故 於是乎有墓祭焉 旣祭墓則不可無齊宿之所故 於是乎有菴焉 以寓追慕之誠 此天理人情之不容已者也 豈不懿哉 古龜山鎭之南荏谷山下 有村 曰水晶 李之全州氏 居之 我太宗王弟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