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227

진북면 정현리 김해김씨 여강재 廬岡齋

진북면 정현리 564(대현길 12-1)번지 여강재廬岡齋 앞에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의 후손으로 아버지 김현호金顯昊를 극진히 모신 득명得命, 득추得秋, 득해得海 삼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표효각表孝閣이 있다. 여강재廬岡齋의 대문에는 편액이 없고 열쇠를 가진 분이 마을에 계시지 않아 내부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廬岡齋記 余嘗過廬山之下 求門其所謂三孝子碑閣 三孝子者故松庵金公之子也 余意 三子之孝必有其源 而恨未聞其詳也 粵三兩丙戌 公之嗣孫鍾一 謀諸族築廬岡齋 爲公歲祭齊宿之所 介吾友弦齋而李康瑄氏 屬余以揭楣之文 余辭之不獲 按其家傳 公諱顯昊字達義 駕洛王之後 節孝先生之十二世孫也 以出群之資 擩染先休 事親以ᆻ親心爲心 故父母安其孝 推以接人 以信義相與 故人皆悅服 嘗筮仕爲郞官 尋賦歸還鄕 擇廬阜深處 植松環庭 自號曰松庵..

진북면 괴정리 경주김씨 모선재 慕先齋

진북면 대티리 35-1(귀정길 19)번지는 괴정마을로 경주김씨慶州金氏 괴은槐隱 김시달金時達를 추모하는 모선재慕先齋가 있다. 구글 지도는 「위도 35°09'49.0"N 경도 128°28'28.2"E」를 표시한다. 모선재慕先齋의 솟을대문에는 일원문一源門이라 편액 했고, 본재를 모선재慕先齋라 이름하며 주련과 모선재기慕先齋記 등이 대청의 문미에 걸려 있지만 사진으로 담지는 못했다. 慕先齋記 古鎭海縣之槐亭慶州金氏世庄也 金氏之胥宇玆土者 自通訓大夫軍資監正 槐隱諱時達 肇焉余與金氏夙有雅契會銘槐隱公 斧堂之碣欽 其磊落之像 愷悌之德 挽近築五楹之齋于 椊坊爽塏地 榜以慕先 而求余以記 實之文誼 有所不容辭夫慕焉 而有齋所 以追報祖先 而不忘其所本也 此固天理 民彛之不容己焉者 而若夫祖先 啓佑變葉相承貽厥 有址則後孫 瞻慕之誠 得無永厥世而彌深切也..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동포재 東圃齋

진북면 정현리 766-1(정삼길 168-24)에는 창원황씨昌原黃氏 동포東圃 황대승黃大承을 기리는 동포재東圃齋가 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10m이고 「위도 35°10'21"N 경도 128°27'44"E」를 표시한다. 동포재의 솟을대문에는 수진문守眞門이라 편액 했고 본재의 이름은 동포재東圃齋라 했으며, 기둥의 주련은 한글로 하여 읽기 쉽게 하였고 옛 동포재중건기東圃齋重建記와 상량문上樑文 외에 새로 새긴 한글 기문과 상량문이 있다. 시운은 걸려 있지 않으나 해산海山 이은춘李殷春의 책에는 시운이 있어 소개를 한다. 山高於北水長東 산은 북쪽에 높고 물은 동쪽에 길게 흐르니 應是先生百世風 이것은 당연히 선생의 백세 풍이리 大路連通巫峽衷 큰 길은 이어져 무협속으로 가까웠고 前川流下島橋中 앞 냇물 흘러서 섬 다..

성균관 비천당 丕闡堂

비천당丕闡堂은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1664년 건립된 성균관의 별당으로 명륜당과 같이 재생齋生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1661년(현종 2) 도성 안에 있던 인수원仁壽院·자수원慈壽院 등 두 사찰을 훼철하고, 우참찬 송준길宋浚吉의 제안으로 그 재목을 북학北學의 진흥사업에 사용하려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비천당이 되었다. 비천당丕闡堂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가 성인聖人을 찬贊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다. 丕闡堂記 上之二年辛丑命地部禁國內僧尼 大臣以猝處無漸爲言 上曰 然然則先罷京裏兩尼院 以建北學於 是有司之臣 奔走奉行 惟北學之建 以年侵而有待焉 癸卯九月大司成臣閔鼎重啓曰 北學旣未易設而 兩院材尼擯於無用請就太學 以修齋舍之..

성균관 대성전과 동서무 대성전상량문 大成殿上樑文

大成殿上樑文 天未喪斯文。蔚啓邦家之再造。道不墜於地。聿見聖廟之重新。美哉宏規。猗歟盛事。恭惟我朝。當聖祖定鼎之日。首建學宮。及太宗纂祚之初。增新廟宇。坊名崇敎里號興德。占城東之別區。右連華岳左拱駱山。鍾漢陽之秀氣。祀典大備於列聖。祠制丕闡於累朝。逮我聖上。躬精一之傳。任君師之責。橫經問道。屢降汾水之鑾。釋菜臨雍。頻屈峒山之駕。春秋之享朔望之奠。式禮罔愆。俎豆之儀金石之音。有秩斯格。流誦聲於璧水。煽文風於環林。不幸邦運之迍邅。遽見島夷之猖獗。百年宗社之慘。尙忍言哉。三韓文物之休。吁其盡矣。嗟我聖廟之有侐。亦被兵火之俱焚。黌舍荒蕪。寂寞茂草之域。廟貌顚倒。凄涼灰燼之墟。行途悲嗟。士林沾灑。道未嘗一日亡也。豈容斬伐消鑠而使之無。學所以三代共之。宜其修擧振作之不可緩。於是公私協力。遠近齊聲。或倒家財而效誠。或捐官廩而補役。爰因舊而謀始。乃鳩材而僝功。新甫之柏徂倈之松。若鬼輸而神運。公輸之巧魯..

성균관 향관청 享官廳

향관청享官廳은 1474년 대사성 성현(成俔)이 경연 때 임금께 아뢰어 창건한 건물로 문묘(文廟) 향사(享祀) 때 헌관(獻官) 및 제집사(諸執事)들이 거처하며 심신을 청재(淸齋)하는 장소이다. 당시 뜰 아래에 동서월랑(東西月廊)이 있었으며, 그 아래로 포주(庖廚)가 있었다. 1966년에 파괴된 동서월랑과 포주는 1986년 문화재관리국의 보조로 동서월랑만 중건되어 전한다. 享官廳記-洪貴達 成均館。古無有享官廳。前大司成成公俔。爲特進官。嘗於經筵啓曰。國朝禮先聖先師。歲用春秋之仲月。用朔望享祀惟謹。顧惟獻官諸執事淸齋之無其所也。當祭時。率假寓於東西齋。其齋之學生亦執事者。面無所容。乃移寓於館奴之家。有乖潔淨禋祀之義。乞於隙地。別構一廳。以爲享官齋所。上曰可。其與繕工提調。相地經營之。於是繕工提調臣韓致亨鄭文炯,同知館事廣川君李克增曁臣成俔。乃相正..

성균관 명륜당의 명륜당기와 명륜당상량문 明倫堂上樑文

성균관 명륜당 대청 위에는 많은 편액들이 달려있다. 그 중에서 명륜당을 설립한 이유를 담은 명륜당기明倫堂記가 있어 먼저 소개를 하고 편액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명륜당상량문明倫堂上樑文 역시 글로 남아 있어 명륜당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명륜당에 남은 편액들은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오른 문장과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성균관 방문 때마다 하나씩 읽어 보기도 하지만 능력의 부재로 항상 아쉬움을 뒤로하고 왔다. 지금이라도 살펴보고 공부할 기회를 가진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고전원문-무명자집-無名子集 詩稿 册二 / 泮中雜詠。二百二十首】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明倫堂後岡,有萬松蒼欝,世呼“碧松亭”。其下卽明倫堂,後壁上揭三箇金字,是朱子筆。前簷又揭朱之蕃墨字,而詩不及之 명륜당(明倫堂) 뒤의 언..

성균관 명륜당 영역의 존경각과 육일각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의 영역 내에 있는 존경각尊經閣과 육일각六一閣은 명륜당의 좌측 뒤쪽에 있는 건물이다. 존경각尊經閣은 책을 보관했던 서고였고 육일각六一閣은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던 궁시(弓矢)·웅후(熊侯)·미후(麋侯) 등을 보관하는 전각이다. 두 건물 다 문이 잠겨있어 내부는 구경을 할 수 없었고 존경각기尊經閣記는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찾았다. 【고전원문-무명자집-無名子集 詩稿 册二 / 詩】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尊經閣在明倫堂後,貯群書,使一吏掌之,諸生常借讀。今則日漸亡失,層架殆空云。 존경각(尊經閣)은 명륜당 뒤에 있는데 많은 책을 소장하고 관리 한 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유생들이 늘 여기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지금은 장서(藏書)가 나날이 망실되어 층층의 서가가 거의 비었다고 한다. 尊經閣..

성균관 명륜당에 걸린 어제태학은배시 御製太學恩杯詩

조선의 국운과 함께 그 생명력은 잃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옛 기억의 저편을 아련히 전하는 명륜당明倫堂은 우리나라의 슬픈 사연인 듯 꿈과 미래를 내려놓고 건물만 지금에 전한다. 삼성에서 운영하는 성균관 대학이 있기는 하지만 그 맥을 전했다 말하기 힘들다. 옛날 시골의 선비가 이곳에 들어가려면 지금의 서울대학보다 힘들었고 소위 난다긴다하는 천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공부를 했던 치열한 출세의 전쟁터였고 단지 입학을 했다는 것으로도 벼슬이 주어진 성균관의 위용은 찾을 길 없다. 빛바랜 명륜당의 편액 뒤 대들보에 걸려 있는 가장 크기가 큰 편액은 『어제태학은배시御製太學恩杯詩』 편액인데 몇 번의 방문에도 그 전문을 옮기고 해문을 전달할 생각 조차 못했다. 이번 방문을 통해 하나씩 성균成均館 전체의 건물에 대해 아는..

진북면 정곡 김해김씨 세심재 洗心齋

진북면 인곡리 903-1(진북정곡길 219)에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운곡부군雲谷府君을 향사하기 위해 6.25동난으로 잿더미가 된 글방을 1969년 후손들이 세심재洗心齋라는 이름으로 재건했다. 구글지도는 「위도35°07'32.4"N 경도128°26'17.2"E」를 표시 한다. 대문에는 경관재敬觀齋라 편액했고 본재에는 세심재洗心齋라 이름하고 4개의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으며, 대청 위에는 세심재중수기洗心齋重修記와 상량문上樑文이 있고 원운原韻과 차운次韻 등이 걸려 있다. 洗心齋重修記 國師山出自艅航西而南 南而復東至于 國師拔乎華 而分爲三麓一 則東走爲義林智山 而止一則南走爲玉峯牛山 而止中則東走爲尼丘山 而止右夾爲禮谷玉溪牛山 左夾爲仁谷義谷知山中 藏一谷曰正谷天 我高祖雲谷府君所占 而藏修焉窃念 仁義禮智四德 皆申於正心 而發則修身齊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