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 9

성주사 곰절의 금석문-홍종영마애불망비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산 213-2번지의 성주사聖住寺 가는 길옆에는 자연 거석의 일부를 비석의 형태로 다듬어 글을 새긴 마애석이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32m이고 위치기반 고도계는 「위도35°10'35"N 경도128°42'58"E」이다. 『성주사 나무아미타불마애비』에서 절 방향으로 약 20m쯤 위쪽 길 좌측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는 야생차나무가 조금 서식한다. 그 차나무 바로 뒤쪽은 큰 암석이 절벽을 이루고 있다. 이 암석은 시누대가 앞을 가려 암석에 새긴 글씨가 숨겨져 있었다. 옛 기억을 더듬어 이 암석을 찾고 자세히 살피니 『홍종영마애불망비洪鍾永磨崖不忘碑』라 불리는 마애비가 보였다. 차량에서 낫을 가져와 시누대를 베어내고 글씨가 잘 보이도록 했다. 이 암석에는 3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중..

성주사 창건기로 본 믿기 어려운 역사 이야기

2020.6.1. 장복산 능선에서 본 성주사 곰절 이 사진을 찍은 곳은 웅산에서 안민고개로 내려오는 능선으로 높이는 해발 452m, 위도 35°09'58.5"N 경도 128°42'48"E의 위치이다. 아래의 2012년 사진과 비교해보면 숨은그림찾기처럼 변해가는 성주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주사聖住寺의 또 다른 이름이 웅신사熊神寺이다. ‘성인이 머무르는 사찰’이란 의미의 성주사聖住寺와 ‘곰의 신령이 있는 절집’이란 의미의 웅신사熊神寺를 동시에 사용하는 절집이다. 그래서 내가 어릴 때부터 ‘성주사 곰절’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성주사聖住寺의 창건설화는 2가지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 하나가 가야시대 남방불교를 전파한 장유화상長遊和尙 창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흥덕왕 때의 무염국사無染國師 창건설이다. 첫째..

성주사 곰절의 금석문-남무아미타불마애비

『불모산성주사佛母山聖住寺』 표지석에서 옛길을 따라 걸어서 가다 보면 길 좌측에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새긴 마애비磨崖碑를 만난다.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람들의 이름과 화주化主 강등암姜藤巖의 업적을 새겨 두었다. ③의 해설을 붙이자면 비신碑身과 비개碑蓋는 제대로 갖추어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었으며, 『광서임진추光緖壬辰秋』라는 내용이 각자 되어 있어 고종 29년(1892) 가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 높이는 204cm, 비신 높이 133cm, 너비 105cm이다. ① 金鍾瑨 号杞泉 김종진 호기천-김종진은 기천이라 불렀다. ② 化主藤巖璨勛 화주등암찬훈 襢越同參僉貟 단월동참첨원 【주석】 화주는 조실祖室인 등암藤巖으로 이름이 찬훈璨勛이며 성은 강씨姜氏이다. 보시(단월襢越..

성주사 곰절의 경주이씨 마애석

2020.5.26. 성주사의 경주이씨 선산 표지석 성주사의 절집 쪽에 있는 개울의 큰 바위에는 경주이씨의 선산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의 해발 높이는 139m이고, 구글지도는 위치를 「위도 35°10'33.4"N 경도 128°43'03.7"E」를 가리킨다. 성주사 동종이 있는 곳에서 성주사탬플스테이를 하는 곳으로 내려서 좌측의 계곡 맞은 편을 보면 『경주이씨마애석慶州李氏磨崖石』이라 이름하는 마애석이 보인다. 철책을 어렵게 넘어서 그 내용을 보니 경주이씨 선산의 표지석으로 바위의 위쪽에 조부 방화芳華, 아버지 성률星律의 묘지가 있는 위치를 걸음의 수로 기록해 두었다. 이 마애석에 기록을 남긴 사람은 첫째 손자인 인식仁植과 둘째 손자인 인곤仁坤이며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1890년에 이 선산 표시석인..

400년 전 창원부사가 기우제 올린 성주사 聖住寺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17년 창원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아 창원부사 신지제(申之悌)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 위해 웅신사(熊神寺) 즉 지금의 성주사(聖住寺)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지은 애절한 시(詩)가 있어 소개를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농경이 경제의 첫 번째이고 치수(治水)가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었던 시대를 살아 온 선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제례의 한 단편을 본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기우제는 천주산(天柱山)의 용지봉(龍池峰)에서 지내 왔다는 설(說)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부사가 기우제를 올린 곳은 성주사 곰절임을 밝힌 자료이다. 또한 기우제문을 짓는 형식도 감상할 수 있어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때 사용한 심리치료의 형식을 넌저시 보게 된다. 熊神寺¹⁾-申之悌²⁾ 기우제를 지내..

요천시사와 창원 성주사 관음보살입상 이야기

창원의 선비가 남긴 소산집(小山集)을 보다가 소산 김기호(小山 金琦浩 1822~1902)가 쓴 요천회운(樂川會韻)을 보게 되었다. 이 한편의 시에 우리지역의 잊혀진 역사가 남아 있기에 소개를 한다. 요천회(樂川會)는 지금의 요천시사(樂川詩社)로 이어졌는데 처음 요천회는 김녕김씨의 후손인 사파정동(沙巴丁洞) 김기호 선생을 중심으로 1859년 완암의 정재건(鄭在建), 안촌의 송병정(宋秉正), 덕정의 김진헌(金振憲), 모산의 김정호(金廷浩) 등과 이곳에서 요천유계(樂川儒契)를 맺고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계제사(契祭祀)를 지내고 시사를 열었다. 아래는 소산 선생이 읊은 요천회운(樂川會韻)의 원문과 해문을 옮겨 둔다. 樂川會韻 요천회(樂川會)¹⁾ 운 龍華菴下一長川 용화암(龍華菴)²⁾ 아래 긴 시내 흐르는데 ..

창원시 성주사(곰절)의 이모저모

성주사는 현재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불교의 모양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절이 되었다. 예전의 한적함이나 아담한 모습은 사라지고 건물의 규모도 많아지고 크기도 웅장해져 점점 기업화 되어가는 종교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변해가는 성주사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하며 전체 풍경과 건물, 성물의 위치변화 등을 살펴보고 새로운 구조물의 변화도 살펴본다. 2012.1.5. 안민고개에서 바라 본 성주사 풍경 성주사 입구의 어수각 성주사의 어수각 성주사 입구에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옆에 있는 바위에 어수각(御水閣)이라 새겨둔 글귀가 보인다. 어수각은 가야국 수로왕 아들 10명 중 7명이 장유화상을 따라 불모산으로 출가하여 수행 하게 되자 수로왕과 황후가 출가한 아들을 찾아..

창원향토민속자료 제4호 천선동 석제단

창원향토민속자료 제1, 2, 3호는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는 오래된 향토민속자료이나 창원향토민속자료 제4호로 명명하는 ‘천선동 수문당 석제단(遷善洞 樹門堂 石際壇)'은 1990년에 “천선동유적비”를 세울 때 함께 만든 것이다. 석제단이 있는 곳은 창원시 천선동 454번지 일대이다. 이 석제단의 형태는 내부의 너비가 140cm, 내부의 높이 141cm, 제단 안의 깊이는 170cm이다. 제단 안에는 상석이 놓여 있는데, 상석의 가로 길이는 110cm이고, 세로 길이는 60cm이며, 두께는 6cm이다. 상석 앞의 향대는 가로 50cm, 세로 21cm, 두께 23cm이다. 제단 위의 덮개돌 3개는 가로 260cm, 세로 45cm, 두께 20cm로 되어 있다. 석제단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 방향에 성주..

佛母山과 성주사(곰절)

성주사 전경 불모산佛母山과 성주사(곰절) 창원시 성주동 불모산 기슭에 위치한 성주사는 두가지 전설이 전해져온다. 그 하나는 가야시대 장유화상 창건설이고, 또 하나는 무염국사 창건설이다. 장유화상 창건설 가야불교의 인도직수입설(불교남방전래설)을 말한다.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오면서 함께 온 사촌오빠 장유화상(허보옥)이 머무시도록 김수로왕께서 창건한 가야시대의 고찰로서 김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서 난 아들중 일곱명이 모두 불모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는데 당시에 창건 되었으리는 것이다. 하여 불모산(佛母山)이란 명칭도 허황후를 기리기 위하여 붙쳐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장유화상의 흔적중에 지암사(장유사)가 있는데, 위치는 김해시 장유면 용지봉 기슭에 자리 하고 있다. 석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