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군 함안면 봉성리(鳳城里) 1319-2(덕암길 103)에 위치하는 『함안향교(咸安鄕校)』는 경상남도 유형문문화유산(1983.08.06.)에 등록된 문화재로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좌표는 35°14'10"N 128°25'04"E이고, 해발 고도는 63m이다.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세워진 것으로 그 뒤 한국전쟁 때 불탔으나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출입문인 외삼문은 풍화루(風化樓)이고,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일렬로 서 있으며,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특이한 것은 대성전의 좌우에 동·서무가 나란히 서 있는데, 이것은 급경사지라는 지형의 제약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甲午改革;1894) 이후 제사만 지내는 기능만 하고 있지만 그것마저 제대로 하는지 의문스럽다.









明倫堂重修記
歲已亥七月 吾州之重修明倫堂成焉 凡六棟五間也 今重修之顚未典校趙學來君事實記之 故余玆不復焉 盖古昔全盛之世家塾黨庠國學 皆所以明人倫 而人生八歲入于小學 以敎之 及至十五入于大學 學禮習射 忠君孝親悌長信友 與夫喪葬之儀 而患難相救 終至修齊治平 天下變革有常 世級叔季悲夫惜乎 倫常淪斁 英甚 此何時哉 此何變哉 今歲一祀孔顏會思孟諸聖哲先聖先師 論語曰 孔子之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又便便唯謹 爾夫子曰 本立而道生 吾願鄕中僉賢當肅敬 預齊競競乎 其間務本乎 忠君孝親敬長信友 又相與德業相勤 過失相規 有光於前人 吾道將明 而斯堂永賴 而勿弊矣 幸相永益勉之哉
己亥八月 日
後學載寧 李秉澤 謹撰
명륜당 중수기 (明倫堂重修記)
기해년(己亥年) 7월에 우리 고을의 명륜당 중수가 완성되었다. 무릇 여섯 동에 다섯 칸이다. 이제 중수된 과정의 전말은 전임 전교(典校)인 조학래(趙學來) 군이 사실대로 기록하였으므로, 나는 여기에 다시 반복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대개 옛날 전성기 시절에는 가숙(家塾), 당상(黨庠), 국학(國學)이 모두 인륜을 밝히기 위한 장소였다.
사람이 태어나 여덟 살이 되면 소학(小學)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고, 열다섯 살에 이르러 대학(大學)에 들어가 예(禮)를 배우고 활쏘기(射)를 익혔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께 효도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벗을 믿는 것과 나아가 상을 치르고 장례를 지내는 의식(喪葬之儀)과, 환란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 도리까지 모두 배웠다. 종국에는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천하의 변혁에는 상도(常道)가 있으나, 세상이 말세(叔季)로 변해버린 것이 슬프고 애석하다! 인륜의 기강이 무너져 버린 것이 심하니, 지금이 어느 때인가? 지금이 무슨 변화인가?
올해에 한 번 공자(孔子), 안자(顏子), 증자(曾子), 사자(思子), 맹자(孟子) 등 모든 성현(聖哲)과 선성선사(先聖先師)에게 제사를 지낸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공자께서는 고을(鄕黨)에 계실 때에는 삼가고 조심하여 말씀을 잘 못하는 듯하셨으나, 또 말씀하실 때에는 분명하고 조심스럽게 하셨다."고 했다. 우리 스승(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근본(本)이 서야 도(道)가 생긴다"고 하셨다.
나는 우리 고을의 여러 현자(僉賢)들이 마땅히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미리 마음을 정제(齊)하여 떨리고 두려워하는 듯이 조심하며 그 사이에서 근본에 힘쓰기를 바란다.
그 근본이란, 임금께 충성하고, 어버이께 효도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벗을 믿는 것이다.
또 서로 더불어 덕을 닦는 일에 힘쓰도록 권하고, 허물과 잘못이 있으면 서로 규제하여 이전 사람들보다 빛이 나도록 한다면, 우리 도(吾道)가 장차 밝아질 것이고, 이 명륜당은 영원히 의지하며 폐하지 않을 것이다.
부디 서로 길이 도와 더욱 힘쓰기를 바란다!
기해년(己亥年) 8월 일
후학 재령 이병택(後學載寧 李秉澤) 삼가 짓다.

明倫堂重修記
古者奠先聖先師於學後世易之 以廟享孔子聖人 及諸賢哲 歷代儒賢 自天子諸候虔恭拜跪禮如親子弟者 通國都郡邑有孔子廟 則有明倫堂焉 夫聖人日月也 人倫所以明也 惟天生民非食不生非教不人 若昔唐虞建官稷播穀契敷教故曰 父子親君臣義夫婦別長幼序朋友信 此五者人之大倫直天地潰日月毀 而後倫可廢也 明倫堂之不可一日無於天下也審矣 咸安郡據洛江下流 其土信美其俗尙禮義郡城南一里 舊有孔子廟外設明倫堂歲久將圮郡中人士相與協謀 而董治之乃 以庚申仲春工告訖五樑十八楹翼然煥然工費萬一出郡中 而人無怨嗟 嗚呼 彛性之在人心者不可誣也 或曰 今君國破亡異敎鴟張郡國 舊有孔子廟 或不能保守於其明倫何 是何不然夫人倫者天常也 三代聖王所共由之升于 大猷我國明倫堂實爲王化之基本誰 其斁之誰 其斁之今 天下國異敎人異論不由孔子術者多矣 然亦能爲國效忠爲政 以信惟大倫未明爾如有王者 作欲用夏變夷安知夫明倫堂不復古之權輿也 又安知吾郡之力 葺斯堂者不爲來世勸也 予亦孔子徒也 庸識厥蹟以贊攸始
庚申年 春節 後學 載寧李熏浩 謹記
명륜당 중수기 (明倫堂重修記)
옛날에는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께 학(學)에서 제사를 올렸으나, 후세에는 이를 바꾸어 사당(廟)을 지어 성인 공자(孔子)와 여러 현철(賢哲), 역대 유현(儒賢)들을 모셨으니,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로부터 지극히 공경하여 절하고 꿇어앉는 예(禮)가 마치 자기의 친자제에게 하듯 하였다. 온 나라의 도읍(都邑)과 군읍(郡邑)에 공자의 사당(孔子廟)이 있으면 곧 명륜당(明倫堂)이 있는 것이다.
무릇 성인(聖人)은 일월(日月)과 같아서 인륜(人倫)이 이로 말미암아 밝아진다. 오직 하늘이 백성을 낳으시어 먹을 것이 없으면 살 수 없고 가르침이 없으면 사람답지 못하니, 옛날 요(堯)·순(舜) 임금이 벼슬아치를 두어 직(稷)은 곡식을 뿌리게 하고 설(契)은 가르침을 펼치게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부자유친(父子親), 군신유의(君臣義), 부부유별(夫婦別), 장유유서(長幼序), 붕우유신(朋友信)」이라 하니, 이 다섯 가지는 사람의 큰 인륜이며, 천지에 곧게 통하고 일월을 꿰뚫는 것이어서, 이것이 무너지고 나서야 인륜이 해이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명륜당이 천하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됨은 명확하다.
함안군(咸安郡)은 낙강(洛江, 낙동강)의 하류에 자리하여 그 땅이 참으로 아름답고 그 풍속이 예의를 숭상한다. 군성(郡城) 남쪽 일 리(一里)에 예전에 공자묘가 있었고 그 바깥에 명륜당을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장차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고을 안의 인사들이 서로 협력하여 의논하고 중수하는 일(董治)을 주관하였다.
마침내 경신년(庚申年) 2월(仲春)에 공사(工)를 끝마쳤다. 다섯 개의 들보와 열여덟 개의 기둥이 새롭고 환하게 단장되었으며, 공사 비용은 만분의 일이라도 고을 안에서 나왔으나 사람들이 원망하거나 탄식하는 이가 없었다. 아아! 떳떳한 본성(彛性)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금은 나라가 깨지고 망하였으며 이교(異敎)가 활개 치고 있는데, 군읍에 예전부터 공자묘가 있었으나 그 명륜당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한다. 이는 옳지 않다. 무릇 ‘인륜(人倫)이란 하늘의 떳떳한 도리(天常)’이다.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이 함께 따랐던 큰 길(大猷)이며, 우리나라의 명륜당은 실로 왕화(王化, 임금의 교화)의 근본이다. 누가 감히 이를 헐어버리며 누가 감히 이를 폐하겠는가?
지금 천하에는 나라마다 다른 가르침(異敎)이 있고 사람들마다 다른 주장(異論)이 있어 공자의 학술을 따르지 않는 자가 많다. 그러나 그들도 능히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정치를 행할 때 믿음을 근본으로 삼으니, 다만 큰 인륜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왕자(王者)가 나타나 중국의 문화(夏)로 오랑캐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어찌 명륜당이 옛 제도의 근본(權輿)을 회복하는 곳이 되지 않을지 알겠는가? 또한 우리 고을의 힘으로 이 당(堂)을 수리한 것이 후세에 권면(勸勉)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나 또한 공자의 제자이기에, 이 흔적을 기록하여 훌륭한 시작(攸始)을 찬양하는 바이다.
경신년(庚申年) 춘절(春節)
후학(後學) 재령(載寧) 이훈호(李熏浩) 삼가 기록함

明倫堂重修上樑文
伏以 大道出原于天是其爲民極 學堂首善之地所以明人倫 庠制維新 堂號仍舊 竊聞王政以學校 爲本人道以彛倫 爲先周辟雍之自西自東自北自南四方 思服虞司徒之有親有義有別有序五敎 敬敷洵浩世成 規亦後生攸法 顧玆大成之殿 寔惟夫子之祠 玉斗珠衡儼然鄕黨之畵 笙篁金石宛若闕里之音 升堂室者爲七十餘得宗於顔曾思孟 歷漢唐而垂千五百會精於濂洛關閩 嗚呼自檀歷箕燮夷用華際 三韓號爲戰國文獻無徵 入熙朝出儒賢都統有的 黜霸功尊王道士用明經之料 崇正學闢異端邦禁非聖之法 地距京師雖遠 人稱鄒魯玆鄕 溓江帶洛江衿環抱乎西北 艅山鎭廬山幹盤據于東南 第緣移校之歲月滋多 僉憂大廈之傾危在即 匠氏却顧而反走驚一木之難支 儒論欲完而旋歧若三年之作舍 初以改塗易檐之意稍費咨詢 終筮上棟下宇之圖亟施營作 時乎土敦而民勸 候若鬼助而神成 載舉脩樑 恭疏短引
兒郞偉抛樑東 儒敎文明天地東 當日乘桴浮海意 聖人無外用其中
兒郞偉抛樑西 誣世莠言恒自西 大義陽秋讀何處 桼離以降夕陽低
兒郞偉抛樑南 齊魯遺風吾道南 文穆絃歌今幾許 巴山錦水水雲涵
兒郞偉抛樑北 衛國有如星拱北 桼秀歌終白馬來 九疇倫敍尊皇極
兒郞偉抛樑上 渾然太極形而上 親親貴貴在賢賢 人事之修天理朗
兒郞偉抛樑下 百川之長海爲下 世有明王仁讓興 九苞一角交於野
伏願上樑之後 一變武斷之習 可見文物之殿 斯道也堯舜禹湯文武周孔立經陳紀 其位則君臣父子夫婦長幼挈綱提維 餘力則學文六藝通而五經立 修道之謂敎九族而百姓昭
庚申年 西紀一九二○年 仲春
進士 咸安 趙昺奎 謹撰
명륜당중수상량문(明倫堂重修上樑文)
삼가 생각하건대, 큰 도(道)는 하늘에서 비롯되어 백성의 지극한 도리(極)가 되고, 학당(學堂)은 으뜸으로 착한 곳이 되어 인륜(人倫)을 밝히는 곳입니다.
학교 제도는 비록 새로워졌으나, 명륜당의 당호(堂號)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가만히 듣건대, 왕도 정치(王政)는 학교(學校)를 근본으로 삼고, 인간의 도리는 떳떳한 인륜(彛倫)을 우선으로 합니다.
주나라의 벽옹(辟雍)이 서쪽, 동쪽, 북쪽, 남쪽으로부터 사방 사람들이 복종하여 생각하게 하였고, 우(虞)나라 사도(司徒)가 친애(親), 의리(義), 분별(別), 질서(序)를 두어 오교(五敎)를 공경히 펴서, 진실로 넓은 세상의 이루어진 법규(成規)이며, 또한 후세 사람들이 본받을 바입니다.
이 대성전(大成殿, 공자의 사당)을 돌아보건대, 실로 우리 공자(夫子)의 사당입니다. 옥으로 만든 북두칠성과 구슬로 만든 저울대(玉斗珠衡, 천체를 상징)처럼 의젓하게 향당(鄕黨)의 그림 같고, 생황과 피리, 쇠와 돌(笙篁金石, 악기) 소리는 마치 곡부(闕里)에서 들리는 음악 같습니다.
명륜당에 오른 사람들은 70여 현으로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에게서 종(宗)을 얻었고,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천오백 년을 이어오면서 염계(濂溪), 낙양(洛陽), 관중(關中), 민(閩, 복건성)의 정수(精粹)를 모았습니다.
오호라! 단군과 기자로부터 오랑캐를 변화시켜 문명(華)을 쓰는 지경에 이르러, 삼한이 전란의 나라라고 불렸을 때 문헌(文獻)으로 증거 할 것이 없었으나, 조선(熙朝)에 들어와 유현(儒賢)들이 나와 도통(道統)이 이어졌습니다. 패도적인 공(霸功)을 물리치고 왕도(王道)를 높였으니, 선비들이 경전(明經)을 쓰는 재목이 되었습니다. 바른 학문(正學)을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쳐, 나라에서 성현의 도리가 아닌 것을 금했습니다. 이곳은 서울에서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사람들은 이곳을 추로(鄒魯, 맹자와 공자의 고향)의 고을이라 일컫습니다.
염강(溓江)과 낙강(洛江)이 띠처럼 둘러 북서쪽을 감싸 안고, 여산(艅山)과 노산(廬山)이 줄기처럼 동남쪽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만 학교를 옮긴 세월이 오래되어, 모두가 큰 집(大廈)이 기울어져 무너질 위기에 놓인 것을 걱정했습니다. 목수(匠氏)가 뒤돌아보고 되돌아가며 기둥 하나가 지탱하기 어려움을 놀라워했고, 유학자들의 논의는 완성하려다가 문득 나뉘어져 마치 삼 년이 걸리는 집 짓는 일처럼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칠을 고치고 처마를 바꾸려는 뜻으로 잠시 자문(咨詢)에 힘썼으나, 마침내는 대들보를 올리고 집을 짓는 도모(圖)를 점쳐 급하게 공사를 시행했습니다. 때로는 흙이 두터워지고 백성들이 힘쓰니, 마치 귀신이 돕고 신령이 이루는 듯했습니다. 이제 다시 대들보를 올리며, 삼가 짧은 서문(序文)을 올립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유교 문명은 천지간의 동방(東)에 있습니다. 당일에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뜬다는 뜻은, 성인은 밖이 없이 그 가운데 도(道)를 쓰는 것입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세상을 속이는 잡초 같은 말은 늘 서쪽에서 나왔습니다. 대의(大義)로운 춘추(陽秋)를 어디에서 읽을꼬, (공자께서) 세상을 떠난 이후 해는 낮게 기울어졌습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제나라와 노나라의 남겨진 풍속이 우리 도(道)의 남쪽입니다. 문목공(文穆, 퇴계 이황)의 풍류(絃歌)가 지금 얼마나 되랴, 파산(巴山)과 금수(錦水)가 물과 구름을 머금고 있습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위나라를 지킴이 북극성을 둘러싼 별들(拱北)과 같습니다. (공자의 덕을) 노래하는 노래가 끝나니 백마가 오듯, 홍범구주(九疇)의 인륜 질서가 임금의 지극한 도리(皇極)를 높입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위로 던지니, 혼연한 태극(太極)은 형체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친애하고 귀한 것을 귀하게 여김은 현명한 이를 현명하게 대우하는 데 있으니, 사람의 일이 닦이면 천리(天理)가 밝아집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모든 냇물의 으뜸은 바다가 아래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밝은 임금이 있어 인(仁)과 겸양(讓)이 일어나니, 봉황과 기린이 들에서 만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들보를 올린 뒤에는 무력으로 판단하는 습속(武斷之習)이 일변하여 문물(文物)이 꽃피는 전당(殿)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이 도(道)는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가 (천하를 다스릴) 벼리를 세우고 기강을 펼쳤으며, 그 지위(位)로는 군신, 부자, 부부, 장유가 기강을 잡고 벼리를 이끌게 하소서. 남은 힘으로는 육예(六藝)의 문장(文)을 배우고 통하여 오경(五經)을 세우고, 도(道)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여 구족(九族)과 백성을 밝게 하소서.
경신년 서기 1920년 중춘(음력 2월).
진사 함안 조병규가 삼가 짓다.

明倫堂重修 上樑文
天開地闢日月中耀聖德與之俱明 彈射砲流棟宇灰土林倡之重建 千古倫綱之不墜 一時廢興之相尋 伏惟孔夫子 萬世之素王 四海之玄聖 祖述堯舜憲章文武其揆 也同 刪正詩書特著春秋是垂莫極 仁智忠恕道脉斯長 瞻忽高堅神明不測 曰州曰郡文廟立 無華無夷菜禮成 亂莫甚於庚年倫堂盡虛址 厄不下於秦火古籍隨無痕 秋草荒而鹿豕遊過者不勝曠古之感 春風回兮英髦議來者豈無維新之思 衆工趍技而效能 不日成而復煥 升堂入室可講六經百家 發軔循途恒勉三畏四勿 君君臣臣父父子子之外道理無他 巍巍蕩蕩溫溫穆穆之中氣象宛爾 是則是傚 可謙可恭 民生古今此此路特眞正 世降叔季異言何紛紜 仁爲基禮爲門是擧庶有復舊之漸 愚希智賢希聖其傚竟由務實之工 載舉脩樑 庸唱偉頌
兒郎偉拋樑東 東山鳳棲樓竹林中 朝陽惟是琅环食 第待明時下舜宮
兒郎偉拋樑西 巴水滔滔赴海兮 不息工夫正如此 終成其大浩無倪
兒郎偉拋樑南 天畔巴峯翼滴嵐 磊礧之中多景槩 如登絶頂興何堪
兒郎偉拋樑北 大坪如海登禾稷 富而且敎語丁寧 終古明王是準則
兒郎偉拋樑上 六氣流行玉宇曠 過化存神皆自然 天翁賦予與同量
兒郎偉拋樑下 門前何事喧車馬 誰知環轍當年勞 欲濟皹生入典雅
伏願上樑之後 神祇俱佑 文化漸宣 日就月將克惇倫常勿惑於虛無寂滅之敎 家絃戶誦恒思體驗竟至於大中昭曠之原
己亥春三月上浣
後學 咸安 趙鏞極 謹撰
명륜당중수 상량문 (明倫堂重修 上樑文)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개벽하여 해와 달이 밝게 비추듯 성인(聖人)의 덕이 더불어 밝으니, 천 년의 윤리 강령(倫綱)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포(匏, 폭탄이나 포탄을 의미)가 쏘아져 흘러가 동량(棟梁, 대들보)이 잿더미가 되었으나, 학자들의 숲(林)이 다시 일으켜 세우니 일시적인 폐허와 부흥이 서로 이어집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공자(孔夫子)는 만세의 소왕(素王)이시며, 사해(四海)의 현명한 성인이십니다. 요순(堯舜)을 본받고 문무(文武)를 법도로 삼으니 그 규범이 한결같습니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바로잡고 춘추(春秋)를 특별히 지어 만세의 가르침으로 드리우니 그 지극한 경지를 우러러봅니다. 인(仁), 지(智), 충(忠), 서(恕)의 도(道)의 맥이 이로써 길게 이어집니다.
갑자기 우뚝 솟아 신령스러움이 헤아릴 수 없으니, 주(州)와 군(郡)에 문묘(文廟)가 서서, 화려하든 오랑캐이든 예(禮)를 이루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경인년(庚年)에 난리가 심하여 명륜당 터가 모두 텅 비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었으니, 진화(秦火, 분서갱유) 때에도 고서적이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은 재난에 비견할 만합니다. 가을풀이 황폐해지고 사슴과 돼지(鹿豕)가 지나다니는 것을 보며 옛 자리를 바라보는 감회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봄바람이 영민한 선비들의 의논에 돌아왔으니, 어찌 개혁(維新)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많은 장인들이 기예를 다투어 공력을 발휘하니, 오래지 않아 건물을 완성하고 다시 빛나게 하였습니다. 강당에 올라 방에 들어가 육경(六經)과 백가(百家)를 강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발걸음을 시작하여 변치 않는 길을 따르며 항상 삼외(三畏)와 사물(四勿)을 힘쓰게 하고,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의 도리 외에 다른 이치가 없게 합니다. 장엄하고 넓고 따뜻하고 엄숙한 기상이 완연하니, 이것이야말로 본받고 공경하며 겸손할 만합니다. 백성들이 예나 지금이나 따르는 이 길이 특히 바르고 올바른 길입니다.
세상이 말세로 하강하여 말들이 어찌 그리 어지럽습니까? 인(仁)을 근본으로, 예(禮)를 문으로 삼아 이것을 실행하니, 옛것을 회복할 기미가 있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자를 바라고, 현명한 자는 성인을 바라니, 그 효험은 마침내 실질적인 일꾼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대들보를 들어 올리니, 위대한 찬가를 부릅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거라. 동산 봉황이 깃든 누각과 대나무 숲 속에서, 아침 해는 오직 옥 같은 음식(琅环食)만을 바라니, 밝은 때가 되기를 기다려 순임금의 궁궐 아래로 나아갑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거라. 파수(巴水)가 도도히 흘러 바다로 가듯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마침내 그 크고 광대한 끝이 없음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거라. 하늘 끝 파봉(巴峯)에 이슬(嵐)이 떨어지니, 돌이 첩첩이 쌓인 곳이 많을지라도 아름다운 경치가 많아, 마치 가장 높은 정상에 올라 느끼는 기쁨과 같으니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기여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거라. 넓은 들판이 바다와 같고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니, 부유하면서도 가르치는 말이 정성스럽고 공경하여, 영원히 밝은 왕이 이를 준칙으로 삼을 것입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위로 던지거라. 여섯 기운(六氣)이 두루 흘러 온 세상에 가득하니, (성현의) 감화가 지나가고 신(神)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자연의 이치입니다. 하늘의 어버이(天翁)께서 주시는 복은 [우리의 노력과] 그 양이 같을 것입니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거라. 문 앞의 수레와 말의 소란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누가 알겠습니까, 수레바퀴의 흔적(環轍)이 그 해의 노고였음을. (병들고) 갈라진 백성들을 구제하여 우아한 법도(典雅)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대들보를 올린 후, 신령한 존재가 모두 돕고, 문화가 점차 퍼져, 나날이 발전하고 달마다 나아가 윤리(倫常)를 돈독히 할 것이며, 허무하거나 적멸(寂滅)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고, 집집마다 글을 읽고 외우며(家絃戶誦) 항상 (도리를) 체험하여, 마침내 지극히 공평하고 밝은 근원(大中昭曠之原)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기해년(己亥年) 봄 삼월 상순(上浣)
후학 함안 조용극(趙鏞極) 삼가 지음

明倫堂重新事實記
丁酉春余就咸安鄕校典校之任 與前任黃禹錫 及掌議趙孟濟焚香大成殿 因周視構內殿門 及明倫堂 與東齋上下階垣 被庚寅之亂蕩爲灰燼庫舍亦與焉 若夫任員齊宿之無所 而勢不可小緩修繕 而未就與前儒道會長趙鏞修 收儒道會米於鄕內補修 現在建物然而僅保破壞之 餘狀不可謂完復 舊光景以積年用心之效 祗買一屋子 而向未移建兼之校中攸入土地盡歸於道財團改革 而祗有貸貰若于纔供祭享 而巳願典校善爲營度焉 此前任者之所云也 余窃聽鄕中章甫之言彼屋陜小不可 爲明倫堂亦念多力屈止入時違講學 然不可廢一郡一明倫堂 故召寫眞士撮影 廢虛全面添付陳情書進達於文敎部長官及國會議長 與夫道知事郡敎育廳 而掌議李鉉善安乙中趙孟濟求屋 四方神弊踵磨而未果旣 而受國庫費三十萬金 敎育廳四十萬金 賣却彼屋遂乃溝屋于 固城又賴趙洪濟李相殷金昌郁義損金招匠人請負移建己亥春明倫堂成 凡五樑十六楹衆來視曰 可於是儒道會長趙性琦及任員諸人各盡力協心自春及秋收會米 於各面各里來助工費 而尙未達 前用庚子春又受金於道費清算 前債夏六月引他人金殿門三間成盖賢勞於此者儘掌議三人也 此三人者敏而有度臨事無僞故一郡人信 而無疑吾亦從而安也 嗚呼 明倫堂首先之地也 吾東五百年郡皆有學 而設殿廟於其上祀先聖先師 以敎不忘其學之所 自盖鄉射習禮明倫養老農尊賢使能之政 無不出於此而又取智仁聖義忠和之士 無所不養焉 而所以治天下國家之道 亦皆素所見聞 而已不待閱習而後能者也 盖古之設學之要如此而已雖然降自後世 其法侵夷不復有此事今天下方亂 異敎百出人皆不知聖人之所學 而貿貿奔走四方又至於倫綱之亦斁有志 於古道者曷不興懷 而爲喟哉 或曰 世道革新人皆廢舊 而從新設學校及教堂 於坊曲曲而教子弟爲常焉 子獨從事再建學堂 而不知其勞子之心不亦苦乎 余曰 今時潮如此吾未嘗不知 而至臨川有云時然而然者衆人也 已然而然者君子也 吾非敢學君子也 計欲背時然而然者而向己然而然者也曰 不然廢漢字之言方行於天下而子獨營建是堂則誰行舊日之事乎 曰昔吾鄉父老之然豈今吾之所 己然者非耶今吾之然豈後日之所 已然者非耶孔子曰 守死善道又曰 天下不喪斯文也 吾自以爲向己然而然者而所以不廢古道也 不廢古道所以不喪文也 雖然餘事尙許多人有之或恐來者之不動於此也 或曰 唯唯余以此爲明倫堂重新事實記。
己亥 西紀一九五九年 八月
後學 咸安 趙學來 謹書
명륜당중신사실기(明倫堂重新事實記)
정유년(丁酉年, 1957년) 봄, 제가 함안향교의 전교(典校) 직책에 취임하여 전임 전교 황우석(黃禹錫)과 장의(掌議) 조맹제(趙孟濟)가 함께 대성전에 분향한 후, 곧바로 경내를 두루 살펴보니, 대성전 문, 명륜당, 동재, 상하 계단과 담장이 경인년(庚寅年) 전란을 겪으면서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곳간(庫舍) 역시 그러했습니다.
관리 임원들이 함께 숙소로 사용할 곳이 없는 형편이라, 상황상 수리를 늦출 수 없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전임 유도회장 조용수(趙鏞修)와 함께 향내(鄕內)에서 유도회 쌀을 거두어 현재 건물을 보수하기는 했으나, 겨우 파괴된 잔재만 보전했을 뿐, 예전의 모습으로 완전히 회복했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마음을 써서 노력한 결과는 겨우 집 한 채를 샀을 뿐, 그것마저 옮겨 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향교의 수입원이었던 토지마저 도(道) 재단 개혁으로 전부 귀속되었고, 다만 약간의 임대 수입만 겨우 제사 지내는 데 쓸 정도였습니다. 이는 전임자가 저에게 일러준 말이었습니다.
제가 향중(鄕中) 선비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집은 너무 좁아서 명륜당으로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저는 힘이 부족하여 중도에 그만두게 될까 염려했고, 때를 놓쳐 학문을 강론할 수 없게 될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한 고을에 명륜당 하나를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사진사를 불러 폐허 전경을 촬영하여, 진정서에 첨부한 후 문교부장관 및 국회의장과 도지사, 군 교육청에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의 이현선(李鉉善), 안을중(安乙中), 조맹제(趙孟濟) 등은 사방으로 집을 구하러 다니느라 닳아 없어지도록 발뒤꿈치가 닳았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국고금 삼십만 금과 교육청 사십만 금을 지원받았고, 이전에 샀던 그 집을 매각했습니다. 마침내 고성(固城)에 있는 집을 구입하고, 다시 조홍제(趙洪濟), 이상은(李相殷), 김창욱(金昌郁) 등의 의로운 헌금(義損金)에 힘입어 장인을 불러 집을 옮겨 짓도록 하청을 주었습니다. 기해년(己亥年, 1959년) 봄, 명륜당이 완공되었습니다.
총 다섯 채, 열여섯 칸으로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에 유도회장 조성기(趙性琦)와 여러 임원들이 각자 힘을 다하고 마음을 모아, 봄부터 가을까지 각 면과 마을에서 회미(會米)를 거두어 공사 비용을 보탰으나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이전에 쓰던 경자년(庚子年) 봄에 다시 도비 청산 과정에서 받은 돈으로 예전 빚을 갚았습니다. 여름 6월에는 타인의 자금을 끌어들여 대성전 문 세 칸을 완성했습니다.
이 일에 현명한 노고를 바친 이는 바로 세 분 장의였습니다. 이 세 분은 민첩하고 도량이 있었으며, 일을 처리함에 사사로움이 없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믿고 의심하지 않아 저 또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아! 명륜당은 가르침의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우리 동방(조선)은 오백 년 동안 모든 고을에 학당을 세웠고, 그 위에 전묘(殿廟)를 설치하여 선성선사(先聖先師)를 모시고, 배움의 근본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습니다. 향사례(鄕射禮), 향음주례(鄕飲酒禮), 명륜(明倫), 양로(養老), 권농(勸農), 존현사능(尊賢使能)의 정치가 이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또한 지(智), 인(仁), 성(聖), 의(義), 충(忠), 화(和)의 인재를 길러내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이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는 모두 평소에 보고 들은 바이며, 굳이 익히고 살펴본 후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저 옛날에 학교를 세운 요점은 이와 같았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후세에 이르러 그 법도가 침해되고 사라져 이러한 일이 다시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천하가 어지러워 이단(異敎)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성인이 배운 바를 알지 못하고 허둥지둥 사방으로 분주하며, 심지어 윤리강상(倫綱)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옛 도리를 마음에 두고 뜻을 세운 사람들은 어찌 마음을 떨치고 크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은 변하여 새 시대가 되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학교와 교회를 동네와 골목마다 세워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런데 당신만 유독 학당 재건에 힘쓰고 있으니, 그 노고를 알지 못하는 당신의 마음이 또한 괴롭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를, “지금의 시류가 이러함을 제가 어찌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임천(臨川)에 이르기를, ‘때에 따라 그렇게 되는(時然而然者) 이는 뭇사람이요, 이미 그렇게 되었으나(已然而然者) 그대로 행하는 이는 군자(君子)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감히 군자를 배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세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을 등지고, 이미 그렇게 되었으나 정해진 도리를 향하여 가려고 계획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자(漢字)를 폐지하자는 말이 바야흐로 천하에 행해지고 있는데, 당신 홀로 이 건물을 짓는다면 누가 옛날의 일을 행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를, “예전에 우리 고향의 부로(父老)들이 그렇게 행했던 것이 어찌 지금 우리가 이미 그렇게 행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행하는 것이 어찌 뒷날에 이미 그렇게 되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공자께서 ‘선을 지키다 죽을지언정’이라 하셨고, 또 ‘천하의 도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저는 이미 그렇게 되었으나 정해진 도리를 향하여 가는 것이며, 이로써 옛 도리를 폐하지 않는 것이라 여깁니다. 옛 도리를 폐하지 않아야 문물(文)이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남은 일이 여전히 많아 혹여 사람들이 오지 않거나, 혹여 이 일에 동참하기를 두려워하는 이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혹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로써 『명륜당 재건 사실기』를 기록합니다.
기해년(己亥年, 서기 1959년) 팔월
후학 함안(咸安) 조학래(趙學來) 삼가 쓰다




西齋重建記
鄕之有校古也 愼齋周文敏公曰 惟我邦在一隅聞道最晚檀降 而猶厖箕來 而漸晰歷二四三國一于麗 而稍明晦軒建赤幟大倡圃隱繼之 學校之設遂大備于 我內以國庠外 以八路三百州莫不興學立廟敎行道微 雖三代不可及也 偉歟偉哉 窃嘗聞之吾東邦文敎之盛 與鄒魯倫洛閩并稱其美矣 夫何滄桑立幻木鐸瑶琴聲聲久寂絃誦揖讓之地 不禁熙寧茂草之感 而我咸州尤被白虎之燹 明倫堂東齋俱燼而墟矣 前典校次第復元顚末已揭於楣可畧也 大成殿滲漏荒落補修之不可 緩西齋傾頹朽欄瓦墁難可施 歲癸丑春典校安君秉學 爲是之憂 而使同無麵之不托殿 則請助於知事 而洛之齋 則渡玄海遍諭於同鄕人 趙贊奎趙乙岩李鎬相安洙昌尹赫孝安商權李聖均 俱得賢義捐 又得其周族傍援之力 亦可見彛好之不泯也 喫辛耐苦六閱朔 而還與儒道會長李弼權 若任員諸彦爲爛商籌畵鳩材募工重築之 此舊制稍宏敞矣 繼之以風化樓齋庖塗粧 及果圓電燈諸般細事役靡 雖不盡心就緒於 是江山呈祥風烟增彩奐 然復覩疇曩之偉觀如非安君慕聖崇儀之 苦心血誠烏能濟事也 日趙鍾壽文泰權二友同從弟麟權 以鄕命屬余文之 以徵來世歆不獲窃觀夫溪山大都梵宇敎堂在 在林立金碧昭耀 而獨儒門鞠茂蕭索 此固晦翁之所以浩歎於盧山者也 今此盛舉倘斯文復興之朕 歟願吾州僉賢勿 以鄕黌之輪奐觀聽之美麗 爲能事畢 而互勉胥勖講磨道義振寂風扶世敎使後進克體安君所 拳拳之義不懈 其保守之策 則可不朽於久遠也 無疑夫
甲寅 一九七四年 元月 下浣
後學 星山 李泰權 謹記
後學 安岳 李相灌 謹書
서재중건기(西齋重建記)
우리 고장에 학교가 있음은 옛날부터의 일이다. 신재(愼齋) 주문민공(周文敏公)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오직 우리나라는 한쪽 구석에 있어 도를 듣는 것이 가장 늦었는데, 단군 시대에 내려왔어도 오히려 혼미하였고, 기자(箕子) 시대에 와서야 점차 분명해졌다. 역대 세 나라, 네 나라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밝아졌으며, 회헌(晦軒)이 붉은 깃발을 세우고 크게 창도하고, 포은(圃隱)이 이를 이으면서 학교의 설립이 마침내 우리 내부의 국학(國學)을 비롯하여 외부의 팔도 삼백 고을에 이르기까지 크게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학문을 일으키고 사당을 세우며 교육이 행해지고 도가 흥했으니, 비록 삼대(三代,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대하고 또 위대하도다!"라고 하셨다.
가만히 듣건대, 우리나라 동방의 문교(文敎)가 성대한 것이 중국의 추로(鄒魯, 맹자·공자의 고향), 은락(倫洛), 민(閩, 주자의 고향)과 그 아름다움을 나란히 일컫는다 하였다. 어찌하여 세상이 변하여 환상처럼 된 후에는, 교화의 도구인 목탁 소리나 거문고 소리가 오랫동안 고요해지고, 글을 읽고 예의를 갖추던 장소에 희령(熙寧) 시대 무성했던 풀의 감상(感傷, 쓸쓸함)을 금할 수 없게 되었는가.
우리 함주(咸州)는 특히 백호(白虎)의 재난을 입어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가 모두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전임 전교(典校)들이 차례로 복원한 전말은 이미 문설주에 걸려 있으니 간략하게 줄일 수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비가 새고 거칠어져 보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서재(西齋)는 기울고 썩은 난간과 기와, 벽돌이 어렵게 시공되어 있었다.
계축년(癸丑年, 1973년) 봄, 전교 안병학(安秉學) 군이 이 일로 염려하면서, 재료가 없는 가운데서도 전당을 짓는 일을 미루지 않고, 대성전에 대해서는 지사(知事)에게 도움을 청하고, 서재에 대해서는 현해탄을 건너 동향인들에게 두루 알렸다. 이에 조찬규(趙贊奎), 조을암(趙乙巖), 이호상(李鎬相), 안수창(安洙昌), 윤혁효(尹赫孝), 안상권(安商權), 이성균(李聖均)이 모두 훌륭한 뜻을 모아 기부하였고, 또한 그의 주씨(周氏) 문중의 도움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 유교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또한 볼 수 있다.
고생을 참아 육 개월을 보내고 돌아와서는, 유도회장 이필권(李弼權)과 임원들과 함께 충분히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며 재료를 모으고 목수를 불러 다시 건축하니, 이 서재는 구제(舊制)보다 약간 넓고 시원하게 되었다.
이어서 풍화루(風化樓), 재포(齋庖, 제사를 위한 부엌)의 단청과 도장, 그리고 과수원 전등 등 여러 가지 세세한 일에까지 비용을 써서 모두 끝마쳤으니, 이로써 강산에 상서로움이 나타나고 풍경이 더욱 아름다워졌으며 찬란하게 바뀌어 옛날의 위대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만약 안 군이 성현을 사모하고 의식(儀式)을 숭상하는 고심과 피와 같은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일전에 조종수(趙鍾壽), 문태권(文泰權) 두 친구와 종제(從弟)인 인권(麟權)이 고향의 명으로 나에게 이 글을 쓰도록 부탁하여 후세에 알릴 증거로 삼고자 하였다.
가만히 보건대, 계곡과 산의 대도시에는 불당과 교회당이 곳곳에 우뚝 솟아 황금색과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는데, 오직 유교의 문만이 황폐하고 쓸쓸하니, 이는 진실로 회옹(晦翁, 주자)이 여산(廬山)에서 크게 탄식했던 이유이다. 지금 이 성대한 거사는 혹시라도 유교 문화가 다시 흥할 징조가 아니겠는가.
원하건대 우리 고을의 모든 현명한 분들은 이 향교(鄕校)의 건물이 아름답게 꾸며지고 듣고 보는 것이 화려해지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고 끝내지 마시라. 서로 권하고 힘쓰며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연마하며, 가라앉은 풍속을 떨쳐 일으키고 세상의 교화(敎化)를 도와 후진들로 하여금 안 군이 간절히 바랐던 뜻을 잘 체득하게 하고, 그 보존하는 계책을 게을리하지 않게 한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고 영원할 것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갑인(甲寅, 1974년) 원월(元月) 하완(下浣, 1월 하순)
후학 성산(星山) 이태권(李泰權) 삼가 기록하다
후학 안악(安岳) 이상관(李相灌) 삼가 쓰다


文廟重修記
禮日春官釋奠于 先聖先師蓋崇儒重道其來古矣 而祀孔子以先聖肇於漢 而歷唐宋至元明致極之典我東則式至 我朝休明上自國學下至 州府郡縣皆立學宮 孔子坐堂中正位南面羣弟子及後代諸賢 或配或從祀或陸廡 各有差等焉 嗚呼 孔子之道如天地日月萬世所共師尊也 夫何叔季以降學孔子者學 皆名存實亡吾道之微 僅如一線 咸郡素稱鄒魯之鄉 而夫子之廟至於頹圯滲漏可勝歎哉 江陵金舜卿知郡事明年周視咨 嗟詢謀鄕儒迺召匠氏經理財用鳩取材木文廟 若東西廡 若正門不逾歲秩然一新 豈非天之所 以默有相於其間者 歟功告訖校任安鼎宰屬余爲記
庚申年一九二○年 二月
巴山 趙昌奎 謹撰 進士巴山趙昌奎文集
문묘 중수기(文廟重修記)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춘관(春官, 예조)이 선성(先聖)·선사(先師)께 석전(釋奠)을 올리는 것은, 대개 유교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긴 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공자(孔子)를 선성(先聖)으로 모시고 제사 지내기 시작한 것은 한(漢)나라에서 비롯되어 당(唐)·송(宋)을 거쳐 원(元)·명(明)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높이는 제전(祭典)이 되었다.
우리 동방(東邦)에서는 조선 왕조의 휴명(休明)한 시대에 이르러, 위로는 국학(國學, 성균관)으로부터 아래로는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궁(學宮, 향교)을 세웠다. 공자는 당(堂, 대성전)의 가운데에 남쪽을 향하여 바르게 자리를 잡았고, 여러 제자들과 후대의 여러 현인들은 혹 배향(配享)되거나 혹 종사(從祀)되거나 혹은 동·서무(東西廡)에 모셔져 각각 차등(差等)이 있었다.
아아! 공자의 도(道)는 천지(天地)와 일월(日月)과 같아서 만세가 함께 스승으로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세(末世) 이후로 공자를 배우는 자들의 학문은 모두 이름만 있고 실상(實狀)은 사라져, 우리 도(道)의 미약함이 겨우 한 가닥 실과 같게 되었는가!
함양(咸郡)은 예로부터 ‘추로(鄒魯)의 고향’이라 일컬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夫子, 공자)의 사당이 무너지고 흙이 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릉(江陵) 사람 김순경(金舜卿) 지군사(知郡事)가 부임한 이듬해에 두루 살펴보며 탄식하고, 향유(鄕儒, 고을의 유림)들과 상의하여 꾀한 끝에, 이에 장인(匠人)들을 불러 재정을 마련하고 재목(材木)을 모았다. 문묘(文廟)와 동·서무(東西廡), 정문(正門)까지 한 해를 넘기지 않아 가지런하고 깨끗하게 새로워졌다.
이 어찌 하늘이 묵묵히 그 사이에 도와주신 바가 아니겠는가! 공사가 끝마쳐지자 교임(校任, 향교의 책임자) 안정재(安鼎宰)가 나에게 글을 지어 기록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920년) 2월 파산(巴山) 조창규(趙昌奎) 삼가 짓다
진사 파산 조창규 문집

大成殿補修 東齋復舊 事實記
去庚寅動亂入城化為灰燼蒼生魚肉矣 吾鄉大成殿則幸爲免禍 而東西廡諸賢牌位散逸無遺明倫堂及東濟皆 爲燒失亂稍定諸賢位牌權奉于 大成殿左右矣 及至趙學來氏之典校重建明倫堂規模頗勝 於前可欽其尊賢衛道之誠矣 安運中氏繼任建庫舍沿垣墻其心亦動且勞矣 運中氏之辭任鄉父老薦不佞 以典之卽甲辰八月釋奠祭日也 顧不侫之誠與不及於前日二君子惟恐瀆任 而招父老之誅誚也 夙夜恐懼庶竭吾鈍與掌議諸員周視大成殿 則前頹後懷而東齋舊虛 則只增茂草之歎矣 校之所有財前此已爲成均館所收去幾 盡復舊之役計無所出 於是會掌儀議之曰 役之次第則當先殿 而後齋其所需之費 則請捐於吾鄉人士之在京有力者 如何僉曰 諸議旣定因與掌議幾 員走京遍訪則同聲隨應者數十人 而趙洪濟成樂三兩氏 最其尤者也 遂招工補修大成殿至於苟完 而始終賢勞者李仁燮趙光濟也 丙午秋享後不侫以任滿辭咸曰 大成殿之重修吾子殫勞矣 而東齋尚未復請吾子無辭以完餘力也 不侫難違父老之言更選任員與儒道會長李鎬燮 及掌議諸員議東齋復舊之事 而創尊聖契每面掌儀二員分會長一員各持契案訪鄉各門 以尊聖之竟勸入于 案則費可醵而齋可復也 因爲推進果如所料 而郡守朴京濟聞于 道以十萬金助之費猶不足際有姓朴名水正者 以吾鄉人僑居日本 而特捐萬金其秉彛之衷可尙 今年春功始告成五楹四架東西 爲房室南爲廳事以其餘金 又及於大成殿風化樓丹靑垣墻之盖瓦幹之任殫勞者 分會長趙性智掌儀金貴斗李弼權李仁燮也 是年七月日牌櫝又成矣 通告于鄉內儒林奉安 東西廡十八賢盖延二十年之久 而今始完役茲安定位於是焉 山益高水盆清 而先聖先賢之靈 若陟降而左右之也 遂畧記事實如右云爾
著雍 涒灘 陽月 日
安陵 李伯鉉 謹記
대성전 보수와 동재 복구 사실기 (大成殿補修 東齋復舊 事實記)
지난 경인년(庚寅年) 동란 때 성 안에 들어와 (난리를 겪어) 잿더미로 변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우리 고향의 대성전(大成殿)은 다행히 화를 면했으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모셨던 여러 현인의 신주(牌位)는 흩어져 남은 것이 없었으며,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는 모두 불에 타서 소실되었습니다. 난이 조금 평정되자 여러 현인의 신주를 임시로 대성전의 좌우 협실(夾室)에 모셨습니다.이후 조학래(趙學來) 씨가 전교(典校)가 되어 명륜당을 재건했는데, 그 규모가 예전보다 훨씬 낫다고 할 만하니, 그 현인(賢人)을 높이고 도(道)를 수호하려는 정성에 탄복할 만합니다. 안운중(安運中) 씨가 뒤를 이어 고사(庫舍)를 짓고 담장을 따라 수리하는 일에 그 마음을 움직이고 또한 노고가 많았습니다. 안운중 씨가 사임하자 향촌의 어른들이 불민한 저(不侫)를 천거하여 이를 맡겼으니, 바로 갑진년(甲辰年) 팔월 석전제(釋奠祭) 날이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저의 정성이 앞선 두 분(조학래, 안운중)만 못할까 두려웠으며, 다만 책임을 소홀히 하여 향촌 어른들의 비난을 받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저의 미련한 힘이나마 다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논의를 맡은 여러 위원들과 함께 대성전을 두루 살펴보니, 앞은 무너지고 뒤는 허물어져 있었고, 동재(東齋)의 옛터는 다만 무성한 풀만 더해졌음을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향교가 가진 재산은 이전에 이미 성균관(成均館)으로 회수되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복구하는 일에 쓸 계책이 전혀 없었습니다.이에 의논을 맡은 여러 위원들을 모아 논의한 결과, 공사 순서는 대성전을 먼저 하고 동재를 나중에 하기로 했습니다. 그 필요한 경비는 우리 고향 사람 중 서울에 거주하는 유력한 인사들에게 기부를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모두가 말했습니다. 이에 여러 논의가 이미 정해지자 논의 위원 몇 명과 함께 서울로 가서 두루 방문하니, 동일하게 호응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으며, 조홍제(趙洪濟)와 성악(成樂) 두 분이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났습니다.마침내 기술자를 불러 대성전을 보수하여 겨우 완비하는 데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애쓰고 수고한 사람은 이인섭(李仁燮)과 조광제(趙光濟)였습니다. 병오년(丙午年) 가을 향사가 끝난 후, 제가 임기가 다 되어 사임하자 모두들 "대성전의 중수는 그대가 힘써 수고했으나, 동재가 아직 복구되지 않았으니 사양하지 말고 남은 힘으로 마저 완성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불민한 저는 어른들의 말씀을 거역하기 어려워 다시 임원들과 유도회장 이호섭(李鎬燮) 및 논의 위원들을 선출하여 동재 복구의 일을 의논하고, '존성계(尊聖契)'를 만들어 각 면마다 의논 위원 두 명과 분회장 한 명이 각기 계약서를 가지고 마을 각 문중을 방문하여 성현을 높이는 일에 힘써 권유하며 안건에 참여하도록 하니, 경비를 모을 수 있고 재(齋)도 복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추진한 결과 예상했던 대로 군수 박경제(朴京濟)가 도(道)에 보고하여 10만 금을 보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경비가 여전히 부족했는데, 마침 박(朴) 씨 성에 이름이 수정(水正)인 이가 우리 고향 사람으로 일본에 머물면서 특별히 만 금을 기부했습니다. 그 선행을 유지하려는 진심을 가상히 여길 만합니다. 금년 봄에 공사가 비로소 완성되었는데, 다섯 칸에 네 개의 가구(架構)로 동쪽과 서쪽을 방(房室)으로, 남쪽을 툇마루(廳事)로 삼았습니다. 그 나머지 돈으로는 다시 대성전의 풍화된 누각(樓閣), 단청, 담장, 지붕 기와 등을 담당하여 노고를 다한 사람은 분회장 조성지(趙性智), 논의 위원 김귀두(金貴斗), 이필권(李弼權), 이인섭(李仁燮)이었습니다. 이해 칠월에 패루(牌櫝, 문루)가 또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향내 유림에게 통지하여 동무와 서무의 18현 신주를 봉안하였습니다. 대략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역사가 완료되고, 이에 안정된 위치를 잡으니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맑게 고여 선성선현(先聖先賢)의 영혼이 오르내리시며 좌우에 계시는 듯합니다. 마침내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여 오른쪽과 같이 말하는 바입니다.
저옹(著雍)균탄(涒灘)양월(陽月)일(日)*
안릉(安陵)이백현(李伯鉉)삼가 기록함
[주석]
저옹(著雍)균탄(涒灘)양월(陽月)일(日)*: 간지(干支)로 연월일을 기록한 것이다. 저옹(著雍)은 세성(歲星, 목성)이 자(子)에 있을 때의 별칭으로 인년(寅年)을, 균탄(涒灘)은 술(戌)의 별칭이다. 양월(陽月)은 음력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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