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책과 기록

오은실기(梧隱實記)

천부인권 2026. 6. 5. 07:38

 

오은실기(梧隱實記)는 오은(梧隱) 신이협(申利協, 1870~1913)의 시문을 모아 1990년 신규섭(申圭燮)7명의 손자들이 발행한 책이다. 책은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으로 엮었고, 노루지 접장에 석판본으로 순 한문 세로글씨로 발간했다. 권두에 지산(只山) 문장근(文章根) 5명의 축하 글을 싣고 광산(光山) 김헌수(金憲洙)의 서문(序文)을 비롯해 벽파(碧波) 우인호(禹寅浩), 이당(怡堂) 김성환(金聖煥), 안동(安東) 김수규(金守圭), 남평(南平) 문재근(文宰根), 영월(寧越) 신기종(辛基鍾)과 월성(月城) 최종헌(崔鍾憲)의 소서(小序)를 붙였다. 권말에 죽계(竹溪) 안창재(安昌載)와 규섭 외 7명의 손자가 쓴 발문(跋文)을 붙였다.

이 책은 2026527일 헌책방 부림서점에서 2만원에 구입했고, 책의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28cm이며, 176쪽이다.

 

 

오은(梧隱) 신이협(申利協, 1870~1913)은 구한말의 유학자로서 향촌 사회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강론했으며, 나라의 주권이 점차 일제에게 침탈당하던 시기에 관직에 나아가 활동했으나, 한일합치 등 나라를 잃은 국치(國恥)를 겪으며 울분을 삼켰다. 오은(梧隱)이 당대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남긴 저술과 시문들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유학자의 고뇌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이협(申利協, 1870~1913)의 관향은 아주(鵝州, 거제)이고 자()는 사강(士剛)이며, 호는 오은(梧隱)이다. 고려 시대 판도판서를 지낸 신윤유(申允濡)가 상조이며, 고려가 망하자 그의 아들 퇴재(退齋) 신우(申祐)가 상주(尙州) 망경산(望京山)으로 들어갔고, 손자 신석명(申錫命)이 상주에서 소주(韶州, 의성) 원흥리로 가문을 옮겨 살았다. 오은(梧隱)의 아버지 신면영(申冕瀅)이 그윽하고 한적한 땅을 골라 춘산(春山) 오목동(梧木洞)으로 이주하였고 신이협(申利協)은 오목동에 숨어산다는 뜻으로 오은(梧隱)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悟隱實記序

盖尚質之世爲士者 務本孝友而悅於親信于友 德行自著於外 粹而央背仰之若山斗望之如魯殿 而惟有可像可儀者矣 自夫世衰道微 閒見益偸爲學者徒取章句之末 而粗解詩書 自矜才藝咀嚼於口射彩於目 而從事悅人 其與世之汙隆人之賢愚 自揣其本末 則相懸非三十里殊 而何如亦云哉 韶州山水之勝擅于嶺鄕 而降自地靈 以其孕精鏟彩而 古多韋布之士 德行之人聞 於鄕邦者也 近有悟隱處士申公 以鵝州舊閥禀自純厚 坯樸恩德口無鄙悖之語 行無乖戾之態 內重而其學堅固旨遠 而其透凝通不踰乎 古之浮灝之氣 常誨群髦曰 德行本也 文藝末也 古人爲學之意 佩而勿失 其丁寧告誠之辭 受業門下弁佩不忘 而各敦孝友相交有信 如平仲則儘乎 其湖州安定之敎也 多取於膾灸口舌之間 而作得淺味也哉 今見實紀一編則公之言行可學而際此淆漓之日 垂範於後日者 相在隣鄕欲其面雅 而亦無荊願常抱肚裏 而曾聞德行 今於紀實之日 不勝難作之感 而爲之敍己耳

丙寅流頭月 光山金憲洙謹敍

 

오은실기서 (悟隱實記序)

대개 바탕이 소박하고 진실했던 옛 시절(尚質之世)에 선비가 된 자들은 근본인 효도와 우애에 힘써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고 벗들에게 신의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덕행이 자연스럽게 외면으로 드러나 순수함이 등과 가득히 배어 나오니,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를 태산과 북두칠성처럼 하고 바라보기를 영종노전(魯殿, 외롭게 홀로 남은 궁궐처럼 높은 권위)과 같이 하여, 오직 본받고 의지할 만한 모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쇠퇴하고 도리가 희미해진 이래로, 간혹 보이는 이들의 소견이 더욱 얕아져 학문을 하는 자들이 한갓 장구(章句)의 말단만을 취하고 시서(詩書)를 대강 이해하면서 스스로 재주와 기예를 자랑하곤 합니다. 입으로만 흥얼거리고 눈으로만 화려함을 쫓으며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일삼으니, 세상의 성하고 쇠함과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 속에서 스스로 그 근본과 말단을 헤아려 본다면 그 격차가 30() 정도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슬프다 하지 않겠습니까?

소주(韶州, 영주 지역)의 뛰어난 산수는 영남 지방에서도 으뜸인데, 땅의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정기를 잉태하고 아름다움을 뿜어내어 옛날부터 벼슬하지 않은 훌륭한 선비(위포지사)와 덕행을 갖춘 이들이 향방(鄕邦, 고향과 나라)에 많이 알려졌습니다.

근래에 오은 처사(悟隱處士) 신공(申公)이 계셨는데, 아주(鵝州, 거제)의 오랜 명문가 출신으로 순후한 성품을 타고나셨습니다. 소박하고 은혜로우며 덕이 있으셔서 입으로는 천박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으셨고, 행동에는 어긋나거나 사나운 태도가 없으셨습니다. 내면은 묵직하고 그 학문은 견고하며 뜻이 깊으셨는데, 그 통달하고 응축된 기운은 옛날의 넓고 크며 깊은 기상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공께서는 늘 젊은 인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덕행이 근본이고 문예는 말단이다. 옛사람들이 학문을 하던 뜻을 마음에 지녀 잃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정성스럽고 간곡한 훈계의 말씀을 문하에서 배운 제자들이 마음 깊이 새겨 잊지 않았으며, 각자 효도와 우애를 두터이 하고 서로 신의로써 사귀었으니, 이는 제나라의 안평중(晏平仲)과 같으며 참으로 호주(湖州) 안 정공(安定先生, 호원)의 가르침이라 할 만합니다. 어찌 입과 혀 사이에서 가볍게 오르내리며 얕은 맛이나 내는 자들과 같겠습니까?

이제 실기(實記)’한 편을 보니, 공의 언행은 본받을 만하여 이처럼 풍속이 어지러운 날에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저는 이웃 고을에 살면서 공의 우아한 면모를 직접 뵙고자 했으나 끝내 기회를 얻지 못해 늘 마음속으로 아쉬워해 왔으며, 다만 예전부터 그 덕행을 들어왔을 뿐입니다. 이제 실기를 엮어 책을 만드는 날을 맞아, 감히 글을 짓기 어렵다는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이 글을 써서 서문으로 삼을 따름입니다.

병인년(丙寅年,1986) 유두월(流頭月, 음력 6)

광산(光山) 김헌수(金憲洙)는 삼가 서문을 쓰다.

 

 

梧隱申公行狀

梧隱處士申公諱利協 字士剛 號梧隱 其先鵝洲人也 高麗版圖判書諱允濡 爲上祖生諱祐 號退齋 全羅道安廉使社 爲屋隱于 尚州望京山勵不二節丁憂盧墓泣血三年淚滴處雙竹生事聞賜額旌閭 亨凁水道溪兩院 是生諱光富中顯大夫內府令 是生諱士廉彦陽縣監 是生諱錫命成均生員 自尚州移居 韶州元興里 三傳諱元福 號靜隱 與弟悔堂公長枕大被友于之樂 如紫荊古事遺艱 而善居喪有大小連之稱 以孝薦除獻陵參奉享梅岡院 四傳諱乃錫號元齋事親 而生致樂致哀廬于墓終其制戊申倡義 曾祖之炫 號尼峰 望重當世祖奭教 號剛翁 文學富贍設絳帳開來學 考冕瀅移住春山梧木洞 厭其故里之喧囂 而擇其幽閒之地也 居之東有喬楠數株扁其楣曰 楠軒端坐靜室日 與古人爲麗澤淹貫百家書道高德重請業之徒 連踵而至各隨其材 而誨之不倦 高宗甲午年間東匪猖獗奮起義旅剿滅樹勳除 通政大夫副護軍 妣叔夫人全州柳氏星文女 眞一齋宗祖后有婦德 高宗庚午四月六日公生天資溫雅才性卓越 早承庭訓專意 篤學文辭夙達 壬午遭內艱喪葬祭奠 克誠克謹迎繼母 而續大人公之斷絃娶 全寧全氏彦洙女 白村文起后閨範 甚備克配君子自後 爲大人公行生前朔望 或餠或鷄二十餘年間 一日無闕此豈易哉 言則易而行之難矣 辛卯叔氏下世有三朔襁褓兒慰嫂撫孤竟得成就保家 戊申丁大人公憂二附之物靡不力求 而親檢勿之有悔戚易備至 如禮終制鄕里稱頌益自勤儉家勢漸裕設塾舍教子姪 與村秀爲外王考置祭田 癸丑五月十五日卒于 寢在世年四十四葬于 梧木洞貴人谷壬坐原會葬者 皆痛衋焉 有三男二女男 東植鴻植五植 永川李灌 順天朴魯鏞 二女婿東植 男鉦煥景燮時煥 女適咸陽朴在文 順天朴鍾祿 鴻植男圭燮光燮在燮 女適陜川李鍾錫 五植男汝燮廷燮乃燮 女適商山朴旭 鳴乎 公以出天之孝行人所不能行 而其於久久歲月終始一如何其壯也 自古有特異孝行者編諸史旌其閭傳于 後世者數多 而果有如公者耶 若有續修小學者必編入于 孝行篇首且國有旌楔之典 而世非古國非古矣 許籲無地恨何如之見 其當時挽祭 則極口讚揚不可枚擧 而余之渭陽亦公之門內也 早自髫齡常常往來 聞公之風仰 公之行熟矣 公以孝悌忠信 爲根本田地勤儉和順 爲飮食裘葛 與之同處者未嘗見 其放意而行矯情 而處人有貧窮 而失炊火者發廩 而救之嫁娶 而無資裝者傾帑 而幇之蓋公受禀之美 用心之厚放 此可想得矣 天若假年 而久於斯世 則宜其做許多事業 而豈徒持觚墨者之所大遜也 嗚乎惜哉 公之胤五植甫屬 余以行狀之役 世誼所在烏可得 而終辭哉 遂略書如右 以竣立言之君子

 

檀紀四三二三年庚午流頭節 綾城具玹 謹書

 

 

오은 신공 행장 (梧隱申公行狀)

오은 처사 신공의 휘(이름)는 이협(利協)이고, ()는 사강(士剛)이며, 호는 오은(梧隱)이다. 그 선조는 아조(鵝洲, 거제) 사람이다.

고려 시대 판도판서를 지낸 휘 윤유(允濡)가 상조(윗대 선조)가 되신다. 그가 휘 우()를 낳으니 호는 퇴재(退齋), 전라도 안렴사를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상주(尙州) 망경산(望京山)으로 들어가 은둔하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개를 힘써 지켰다. 부모상을 당하여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우니,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대나무 두 줄기가 자라나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액호(현판)와 정려를 내렸으며, 수동과 도계 두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분이 휘 광부(光富)를 낳으니 중현대부 내부령이었고, 이분이 휘 사렴(士廉)을 낳으니 언양현감이었으며, 이분이 휘 석명(錫命)을 낳으니 성균관 생원이었다. 이때 상주로부터 소주(韶州, 의성) 원흥리로 가문을 옮겨 살게 되었다.

3대를 전하여 휘 원복(元福)은 호가 정은(靜隱)인데, 아우 회당공과 평생 긴 베개와 큰 이불을 함께 쓰며 형제간의 우애를 독특히 하니 마치 자형화(紫荊花)의 옛 고사와 같았고, 가문의 어려움을 남겨두지 않았다. 또한 상을 치름에 예를 다하여 대련·소련(당대 이름난 효자 형제)이라 일컬어졌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헌릉참봉에 제수되었고 매강원에 배향되었다.

4대를 전하여 휘 내석(乃錫)은 호가 원재(元齋)인데, 어버이를 섬김에 살아계실 때는 즐거움을 다하고 돌아가셨을 때는 슬픔을 다하였으며 무덤가에서 여묘살이를 하며 삼년상을 마쳤고, 무신년(1728, 이인좌의 난)에는 의병을 일으켰다.

증조부의 휘는 지현(之炫)으로 호는 이봉(尼峰)이며 당세에 명망이 무거웠고, 조부의 휘는 석교(奭教)로 호는 강옹(剛翁)인데 문학이 풍부하고 깊어 학문의 장을 열고 후학들을 길러냈다.

아버지 휘 면영(冕瀅)은 원래 살던 고향 마을의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그윽하고 한적한 땅을 골라 춘산(春山) 오목동(梧木洞)으로 이주하였다. 머무는 집 동쪽에 큰 남무(楠木, 느티나무 혹은 남무) 몇 그루가 있어 그 문지방에 '남헌(楠軒)'이라는 편액을 걸고, 고요한 방에 단정히 앉아 날마다 옛 성현들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백가의 서적을 널리 꿰뚫으시니, 도가 높고 덕이 무거워 배움을 청하는 무리들이 발길을 이어 찾아왔다. 선생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게을리하지 않고 가르치셨다. 고종 갑오년(1894, 동학농민운동) 연간에 동비(동학군)들이 창궐하자 의로운 군대를 분연히 일으켜 이들을 토벌하여 공훈을 세우고 통정대부 부호군에 제수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 전주 유씨(全州柳氏) 성문(星文)의 딸로, 진일재(眞一齋) 문중의 후손이며 부덕(婦德)을 갖추셨다.

고종 경오년(1870) 46일에 공이 태어나니, 타고난 바탕이 온화하고 단아했으며 재능과 성품이 탁월했다. 일찍이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으며 독학에 뜻을 두어 문장과 글솜씨가 일찍부터 통달했다.

임오년(1882)에 어머니의 상(내간)을 당하여 상례와 장례, 제사를 지냄에 정성과 삼감을 극진히 하셨다. 이후 아버지가 맞이한 계모를 극진히 모셔 아버지의 끊어진 거문고 줄( 상처함)을 이어드렸다.

부인은 전녕 전씨(全寧全氏) 언수(彦洙)의 딸로 백촌(白村) 문기(文起)의 후손인데, 규범을 잘 갖추어 군자()의 배필로 극진히 맞춤이 있었다. 이후 아버지를 위해 살아계실 제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혹 떡을 올리거나 혹 닭을 올리며 2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름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신묘년(1891)에 숙부(작은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석 달 된 갓난아이가 있었는데, 형수를 위로하고 외로운 고아를 어루만져 길러내어 마침내 가문을 이루고 살 수 있도록 성취시켜 주었다.

무신년(1908)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장례에 쓰이는 물품을 힘써 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친히 점검하며 후회하는 빛이 없었으며, 슬퍼하고 예법을 갖춤이 극진하여 예법에 맞게 상기(喪期)를 마치니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더욱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니 가세가 점차 풍족해졌다. 이에 서당(학숙)을 세워 자식과 조카들을 가르쳤고, 마을의 빼어난 인재들과 함께 외조부(외왕고)를 위한 제전(제사 비용을 대는 논밭)을 마련하기도 했다.

계축년(1913) 515일에 안방에서 별세하시니 세상에 머문 나이는 44세였다. 오목동 귀인곡 임좌원(壬坐原, 북북서 방향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내니, 상가에 모인 이들이 모두 아프게 슬퍼하였다.

자녀로는 32녀를 두었다. 아들은 동식(東植), 홍식(鴻植), 오식(五植)이다. 사위는 영천 이관(李灌)과 순천 박노용(朴魯鏞)이다.

장남 동식의 아들은 정환(鉦煥), 경섭(景燮), 시환(時煥)이며, 딸은 함양 박재문(朴在文), 순천 박종록(朴鍾祿)에게 시집갔다.

차남 홍식의 아들은 규섭(圭燮), 광섭(光燮), 재섭(在燮)이며, 딸은 합천 이종석(李鍾錫)에게 시집갔다.

삼남 오식의 아들은 여섭(汝燮), 정섭(廷燮), 내섭(乃燮)이며, 딸은 상산 박욱(朴旭)에게 시집갔다.

! 공은 하늘이 내린 효성으로써 남들이 능히 행하지 못하는 바를 행하셨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으니 그 꿋꿋함이 어떠한가! 예로부터 유달리 뛰어난 효행이 있는 자는 역사에 편찬하고 그 마을에 정려를 내려 후세에 전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과연 공과 같은 이가 또 있겠는가? 만약 후일에 소학(小學)을 이어 보완하여 편찬하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이 공의 사적을 효행편의 맨 앞에 실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나라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법전이 있으나, 지금 세상은 옛날과 같지 않고 나라도 예전 같지 않으니, 억울함을 호소할 곳조차 없어 원통함이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당시 그 장례에 제출된 만사와 제문을 보아도 극구 찬양하여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의 외가(渭陽) 또한 공의 가문과 친인척 관계에 있기에, 나는 어려서 머리를 땋았을 때부터 자주 왕래하며 공의 풍모를 듣고 공의 행실을 우러러본 지 오래되었다. 공은 효도·공경·충성·신의를 삶의 근본 바당(밭지)으로 삼으셨고, 부지런함·검소함·화목함·순종함을 날마다 먹는 음식과 입는 옷(裘葛, 겨울 가죽옷과 여름 갈옷)처럼 여기셨다. 함께 지내는 이들 중에 공이 마음대로 방자하게 행동하거나 본심을 속이고 꾸며서 처신하는 것을 본 이가 없었다.

이웃에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자(失炊火者)가 있으면 곳간을 열어 구제해 주었고, 혼인을 치르려 해도 밑천과 혼수 장만이 없는 자에게는 재물을 기울여 도와주었으니, 대개 공이 타고난 아름다운 자질과 마음을 두텁게 쓴 바탕을 여기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이 만약 나이를 더 빌려주어 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하셨다면 마땅히 수많은 큰 사업을 이룩하셨을 터인데, 어찌 한낱 붓과 먹을 쥔 문장가들이 크게 감탄하며 양보하는 바에 그쳤겠는가. 슬프고 아깝도다!

공의 아들 오식(五植) 군이 나에게 행장을 짓는 일을 부탁해 오니, 대대로 이어온 가문의 정(世誼)이 있는 처지에 어찌 끝내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위와 같이 대략을 적어, 훗날 훌륭한 말을 남겨줄 군자(비문을 지을 학자)를 기다리노라.

단기 4323(서기 1990) 경오년 유두절(음력 615), 능성(綾城) 구현(具玹)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