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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 강처사 묘갈명 정사년 1917 南湖姜處士墓碣銘 丁巳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선생은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정밀하게 사색해서 노사(蘆沙) 기씨(奇氏)의 진전을 얻었는데, 그의 훌륭한 제자가 있었으니, 남호(南湖) 처사 강공(姜公) 휘 영지(永祉) 자 낙중(洛中)이다. 강씨(姜氏)는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의 알려진 성씨이다. 이조에 와서 휘 석덕(碩德)이 있으니,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고,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이 분이 휘 희맹(希孟)을 낳았으니, 좌찬성(左贊成)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이 분이 귀손(龜孫)을 낳았으니, 우의정(右議政)이고,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그 뒤로 명덕(名德)이 계속 이어졌다. 고조 휘 주동(柱東)은 증(贈)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며, 증조 휘 태환(泰煥)은 수작(壽爵) 가선대부(嘉善大夫..

진양 강공 묘갈명 晉陽姜公墓碣銘-암서집 제29권

내 선친이 돌아가시고 장사를 지낼 때 고을 이웃의 지구들 중 만사(挽詞)와 뇌문(誄文)을 보내 곡(哭)을 한 사람이 거의 200명이나 되었다. 불초(不肖)는 얼마 뒤 슬픔이 진정되고 차례로 기록해 보니, 같은 마을의 어른 통정(通政) 강공(姜公)이 지은 것이 압권이었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본디 문학(文學)을 전하였고, 또 젊어서는 재주를 가지고 공령문(功令文)을 익혀서 일찍이 한 차례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처는 기국과 능력에 있어서, 무릇 고을에 큰일이 있게 되면 공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고, 고을 수령도 여러 차례 불러서 자기를 돕도록 하였다. 성품도 또한 질박하고 솔직하고 간소하고 강직하여 절대로 남을 따르거나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