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52

창원시 웅천 와성마을 신당

웅천 남문동 542-2번지는 와성臥城마을 입구의 마을 위쪽으로 와성臥城마을의 번영과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신당神堂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21m를 표시하고 「위도35°06'02"N 경도128°45'44"E」라 표시한다.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신당에 제례는 지내지 않으며 할매신당을 모시는 건물은 있을 거라며 대략의 위치를 알려 주는데 처음에는 엉뚱한 곳으로 가서 헤매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와 물으니 방향이 다르다. 할머니가 다시 알려 준 곳으로 가보니 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아예 길은 없고 사람이 이용한 흔적도 없다. 어째거나 없는 길을 뚫고 올라가니 그물망으로 밭 전체를 둘렀다. 그물망을 넘어 밭의 끝부분에 다가가니 풀더미 속에 겨우 흔적이 있다. 신당으로 접근을..

창원시 웅천 사도마을 신당과 신목

웅천 남문동 1284번지는 사도沙道마을의 신목神木인 회화나무 노거수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4m를 표시하고 「위도35°06'16"N 경도128°45'36"E」라 표시한다. 웅천 지역의 신당神堂을 조사하면서 사도마을에도 신령神靈을 모시는 집이 있었음을 알고 찾았으나 지금은 신당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도 미신 아닌 것이 없는데 유독 우리의 전통 신앙信仰만이 미신이라 배척排斥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위대한 문화를 크게 경험하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들의 몸을 있게 하고 생명을 준 조상祖上들의 공동문화가 모여 민족民族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데 우리 민족만이 자신을 있게 한 조상들의 문화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

창원시 웅천 괴정마을 신당

진해구 제덕동 170번지에는 괴정마을 신당神堂인 당집이 위치한 곳으로 GPS고도계는 해발 26m를 기록하고 위도 35°05'562"N 경도 128°44'42"E를 가리킨다. 괴정槐井마을은 조선시대 삼포왜란의 중심지인 왜관이 있던 제포薺浦 즉 냉이개의 선창이 있던 곳으로 바깥지개라 불렀던 곳이다. 당집의 주위에는 팽나무 노거수가 도열한 형태이고 당집 바로 위쪽엔 느티나무가 있다. 당집은 마을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밖에는 낮은 콘크리트 담장이 조성되어 있고, 당집은 측면 1칸, 정면 1칸의 금속기와로 벽체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당산제는 할매신, 할배신, 신목에 매년 음력 1월 1일에 지내며, 제관은 마을사람 중에 不淨(부정)없는 50대 이상의 남자를 선정했었다. 선정된 제관들은 당산제가 있기 7일 전에..

창원시 웅천 제포진 신당

진해구 제덕동 548번지는 제포성지薺浦城址의 두 정상부 중 한 곳으로 GPS고도계는 해발 42m를 기록하고 위도 35°06'22"N 경도 128°44'30"E를 가리킨다. 이곳은 제포성지의 북쪽 옹성이 자리하는 곳으로 성벽의 안쪽에 제덕동의 신당神堂이 있다. 당집의 앞쪽에는 느티나무를 심었고 둘레에는 아름 들이 곰솔이 빙둘러 있으며, 당집의 뒤쪽은 푸조나무 1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신당은 시멘트블록으로 담장을 하고 시멘트블럭으로 집을 지었으며 일본식 시멘트기와를 이었다. 당집의 문에는 흰바탕에 태극문양을 하여 강력한 느낌을 준다. 현재 마을에서 제祭는 지내지 않고 있으며 뒤쪽의 지붕은 내려앉아 비가 당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제포성의 만호가 제주祭主가 되어 정성을 다해 제祭를 올..

의창구 사화동 신목과 신당

창원시의 도심 속에 현재까지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이 함께 존재하는 곳은 사화공원 부지 내 위치한 옛 사화동의 신목과 신당 뿐이다. 신목의 존재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찾아보지 못했는데 우연히 보여준 박회장의 사진 한 장이 구미를 당겼다. 대략의 위치을 알게 됐고 7월 10일 이곳을 방문하여 신목과 신당을 촬영하고 내부는 보지 못한 채 아쉬움을 가지고 돌아섰다. 신당과 신목 사이에 작은 유리상자를 두고 그 속에 촛불을 피워 둔 것으로 볼 때 지금도 매일 기도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듯했다. 사화동 신목이 위치한 곳은 등명산 자락의 남쪽 지역으로 옛 사화마을 위쪽 산 중턱에 위치한다. 지금은 사화동이라는 마을은 사라지고 신목과 신당만이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이곳의 해발고도는 40m이고 위..

400년 전 창원부사가 기우제 올린 성주사 聖住寺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17년 창원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아 창원부사 신지제(申之悌)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 위해 웅신사(熊神寺) 즉 지금의 성주사(聖住寺)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지은 애절한 시(詩)가 있어 소개를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농경이 경제의 첫 번째이고 치수(治水)가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었던 시대를 살아 온 선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제례의 한 단편을 본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기우제는 천주산(天柱山)의 용지봉(龍池峰)에서 지내 왔다는 설(說)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부사가 기우제를 올린 곳은 성주사 곰절임을 밝힌 자료이다. 또한 기우제문을 짓는 형식도 감상할 수 있어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때 사용한 심리치료의 형식을 넌저시 보게 된다. 熊神寺¹⁾-申之悌²⁾ 기우제를 지내..

창원읍성에서 가는 나루터 주물연진 主勿淵津

2017.2.27. 임해진 나루에서 본 주물연진 공관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山川條)〗에는 『주물연진(主勿淵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물연진(主勿淵津)은 부(府) 북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 매포(買浦) 하류이다. 언덕 위에 작은 소공관(小公館)을 개설하여 배를 타고 왕래하는 왜국(倭國) 사신을 접대한다. 【在府北四十里漆原縣買浦下流岸上設小公館以待倭使之乘舩往來】고 기록했다. 2019.5.10. 동정동 천주산 입구 장붕익 선정비 주물연진(主勿淵津)은 창원도호부에서 관찰사가 있는 대구 경상감영으로 가는 도로를 잇는 포구(浦口) 중 하나로 창원도호부에서 출발하여 굴현(堀峴)고개로 향하다 보면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다.”는 천주산(天柱山) 입구에 다..

파괴된 최치원 노닐던 강선대 降仙臺

마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최치원이 드리운 합포의 달그림자’의 책에서 강선대(降仙臺)를 현재 진해구 비봉동(飛鳳洞)에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지만 아니라는 증거가 너무 많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강선대는 『영남읍지-웅천현』편과 『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 산천(山川)』조에 거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 산천(山川)』조에는 강선대(降仙臺)를 아래와 같이 기록을 하고 있다. 【山川 熊山 在縣北十里 爲邑主山 上有奇巖 高十餘丈 周五十餘丈 上可坐三十餘人 屹然特立 名曰天子峰 一脈西走 爲安民嶺 又西走 爲長福山 又西北走爲馬也嶺 又西入爲降仙臺 而山形崒起作臺 與昌原月影臺 隔浦相望 俗稱孤雲崔先生諱致遠 乘舟弄月 遨遊於此故名曰降仙臺 自馬也嶺 又一脈 走西南爲高山 上有烽燧 自高山落脈走西南爲飛巖洞 而有盤石 上可坐五十..

요천시사와 창원 성주사 관음보살입상 이야기

창원의 선비가 남긴 소산집(小山集)을 보다가 소산 김기호(小山 金琦浩 1822~1902)가 쓴 요천회운(樂川會韻)을 보게 되었다. 이 한편의 시에 우리지역의 잊혀진 역사가 남아 있기에 소개를 한다. 요천회(樂川會)는 지금의 요천시사(樂川詩社)로 이어졌는데 처음 요천회는 김녕김씨의 후손인 사파정동(沙巴丁洞) 김기호 선생을 중심으로 1859년 완암의 정재건(鄭在建), 안촌의 송병정(宋秉正), 덕정의 김진헌(金振憲), 모산의 김정호(金廷浩) 등과 이곳에서 요천유계(樂川儒契)를 맺고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계제사(契祭祀)를 지내고 시사를 열었다. 아래는 소산 선생이 읊은 요천회운(樂川會韻)의 원문과 해문을 옮겨 둔다. 樂川會韻 요천회(樂川會)¹⁾ 운 龍華菴下一長川 용화암(龍華菴)²⁾ 아래 긴 시내 흐르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