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199

학생강공 묘갈명 병서 學生姜公墓碣銘幷序

學生姜公墓碣銘幷序 公諱萬圭。字達洙。姜氏。貫晋陽。高句麗元師以式。爲上祖。高麗兵部尙書殷烈公民瞻。爲中顯祖。晋州君渭祥。爲分派祖也。有諱仁壽。號和齋。孝廉薦監察。贈司憲府執義。三傳。翼文號戇菴。師事鄭寒岡先生。有士林重望。文科弼善。至司諫。光海昏朝。立節。贈禮曹判書。子鷗洲大適。與兄寒沙大遂。俱有經學盛名。薦洗馬。丙子胡亂。兄弟倡義。著殊勳。贈左承旨。子徽俊號鵞湖。贈户判。於公。間八世。曾祖曰泰邦。祖曰時汶。考諱遇賢。妣。高靈朴氏龍貞女。以高宗癸巳。生公于陜川郡大陽而鵝川里故第。公。資性稳藉。志氣堅剛。自幼。知愛親敬兄之節。稍長。見其父及兄之從事儒業。不遑經理產業。於是。掇學而幹家。使父兄。安其所業。及其析箸而異居也。有一嶺之隔。而間日來往。定省温清。必誠必敬。以其餘日。盡力于農畒。晨出而暮還。無柱費一寸之光陰。能倍出其田產。以是。田園漸廣。家日以潤。乃隨其力。益虔其奉養。凡飮食衣服..

학생강공 천표명 병서 學生姜公阡表銘并序

學生姜公阡表銘并序 余凤交姜君允瑞東秀。壬戍夏。二君訪余鳳林室東秀。請其先考晩堂公阡上之文曰。吾父有至行。不忍泯没。願得秉管君子一言。以光來世。以狀出眎。允瑞傍助而固其請曰。是狀也。約而無濫。子信而爲徵。余不得辭。而按其狀。公諱秉祚 字奉準。晚堂。其號也。姜氏其先。晋陽人。以高麗兵部尚書殷烈公諱民瞻。爲上祖。自後赫舃。爲東方著姓。六傳。元鑑。太子詹事。五傳。元啟。三重大匡典法判書。佐翼功臣。三傳。勗。封晋川君。入李朝。曰安重。曰琯父子。幷爲翰林。琯子應台。歷典翰大司成。以忠孝。蒙旌。享臨川院。學者稱誠齋先生。傳至諱一齋號瞑齋。自州東白也村。移居樞洞。於公。間八世。曾祖曰水竹亭文伍。重齋金先生。銘其墓曰。温維基德維儀。素乎履。行無詭。祖曰錫字。有質行。考諱在善。號樞溪。妣達城徐氏。父聖淳。以高宗丁亥四月六日。生公于樞洞世第。儀形瑞秀。性温而資淳。自幼少。未嘗肯與人争。不言之過誤。受學于家..

척암강공 묘갈명 병서 隻菴姜公墓碣銘并序

隻菴姜公墓碣銘并序 公諱貞秀。字子元。隻菴其號也。姜氏。貫晋陽。高麗兵馬都元師號以式。爲始祖。傳至國子博士諱啓庸。高麗元宗朝。爲通信使書狀官。封晋山府院君。生諱引文。官殿中内給使。生諱師瞻。忠烈朝監察御使。累傳諱蓍號養眞堂。恭愍王朝登第。歷任重職。封晋山府院君。謚恭穆。生諱准伯號通亭。恭讓王朝。官密直。往還明朝。政堂文學大司憲。朝鮮朝。特徵東北面都巡使。辭不就。三傳。諱孟鄭。世祖朝領議政。諡文景。於公間十五世。高祖諱鳳曄。曾祖諱在喆。祖曰愼庵仁會。壽階通政。有孝行蒙旌。考曰淑亭永鎬。以仁孝。著鄕黨。述菴宋公在晟。撰碣銘。妣金海金氏鎬善女。光武四年八月五日。生公于晋治南冬勿洞世庄。公品性寬厚。風儀淳正。早受學于家庭。不煩提督而自知力學。文理夙就。弱冠。淹貫諸子。時家甚貧。無以資仰事俯育。於是。朝出而耕田。夜歸讀古人書。所履不出乎世傳家學規模。既而。受業于良庵朴公門。又就正于河晦峰權松山諸..

연영강공 묘갈명 병서 淵永姜公墓碣銘幷序

淵永姜公墓碣銘幷序 公諱永壽。字文弘。姜氏其先。晋陽人。高句麗兵馬元師以式。爲始祖。譜系上祖。曰文科國子博士啟庸。自是名德繼世。諱引文。文科殿中內給事。諱師瞻。監察御史。諱昌貴。門下侍中晋山府院君。諱君。政堂文學。鳳山君。謚文敬。諱著。門下替成事。晋山府院君。諡恭穆。諱淮伯號通亭。正憲大夫都巡問使。諱孟卿。中國通信使。高祖曰默庵尙烈。曾祖諱命周。祖曰雙巖載伯。考諱明會。妣晋陽鄭氏。都事元復女。本生考諱仲會。妣東城李氏。父大演。高宗丁酉七月二十一日生公。公相貌俊秀。而動容則仁。質性穩藉。而發氣則剛。幼受學于祖考雙巖公。不提督而自循課程。雙巖公。見公動作異凡兒。每曰他日昌吾家者。此兒也。 旣冠。畧涉經史。時所後父下世已久。母夫人。守節勤紡績。治家甚勞。公曰見母勞。而子豈可以安坐讀書乎。於是。撤學而幹家。助母夫人。共力而立產。克誠以孝。母美人。曰吾不幸早寡。而有孝嗣如此。死無恨矣。事本生庭。..

합천군 삼가면 양전리 강씨사효각 姜氏四孝閣 양세삼효비 兩世三孝碑

합천군 삼가면 양전리 281-2번지에는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 삼효절三孝節을 기리는 강씨사효각姜氏四孝閣이 있다. 이곳을 고도계는 높이 99m, 위도 35°25'21"N 경도 128°08'07"E를 가리킨다.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는 1세 계용啓庸, 2세 급사공給事公 인문引文, 3세 어사공御史公 사첨師瞻, 4세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 창귀昌貴, 5세 문경공文敬公 군보君寶, 6세 공목공恭穆公 시蓍, 7세 통계공通溪公 회중淮仲(1360~1421)의 후손으로 비碑에는 그를 강사운姜思運이라 적었다. 이곳에서 동쪽 방향으로 1.13km 떨어진 삼가면 동리에 있는 인산재麟山齋가 강씨사효각姜氏四孝閣 양세삼효비兩世三孝碑와 관련이 있는 재실이다. 姜氏 四孝閣內 兩世三孝碑記 晋陽姜氏有三孝節 同敦寧諱義守 其妻貞..

고성군 금산리 제말장군과 증손 제명철의 정려각

고성군 대가면 금산리 가동마을 입구인 대가면 금산리 676-10번지에는 정려각旌閭閣이 있는데 문에는 쌍정문雙旌門이라 편액했고 정려각旌閭閣의 정면에는 충효각忠孝閣이라 편액했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63m라 기록하고 위도 35°01'51"N 경도 128°18'29"E를 가리킨다. 정려각은 맞배지붕 와가로 세 개의 기둥을 세우고 두 개의 실室로 구분하여 좌측 실室은 제말장군諸沫將軍¹⁾의 충절을 기리는 곳으로 하고 우측 방은 그의 증손인 제명철諸命喆의 효행정절孝行貞節을 기리는 방으로 했다. 따라서 문의 이름을 두 개의 정려旌閭를 받은 곳이라는 이름의 쌍정문雙旌門이라 편액한 것으로 보인다. 【주석】 제말장군諸沫將軍¹⁾ : 제말 장군의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제조 겸. 어머니는 공주 황씨로 1567년 고성에..

진북 대티리 중촌마을 황래성 공덕비

진북면 대티리 237번지 중촌마을 입구에는 일맥一麥 황래성黃來性 공덕비功德碑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99m를 기록하고 위도 35°10'18"N 경도 128°28'13"E를 가리킨다. 이 공덕비는 황래성공黃來性公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무릅이 헤어진 옷을 기워 입으면서도 마을의 발전과 장학사업을 위해 노력했던 근면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공덕비의 뒷면에는 공적을 기록했는데 아래와 같다. 일맥황래성공덕비一麥黃來性功德碑 공公은 서기 1914년 6월 3일 삼계三溪 창원황공昌原黃公 백수씨伯秀氏의 장남長男으로 이 고장에서 태어나 일찍이 뜻을 세워 고향故鄕을 떠나 오직 성실誠實과 근면勤勉으로 사업事業을 이끌어 오면서 언제나 내 고장을 잊지않고 장학사업獎學事業을 ..

봉림동 지귀·신촌 유허비

지귀·신촌유허비知歸·新村遺墟碑는 『지귀·신촌 옛터』라는 이름으로 의창구 봉곡동 5번지 효자공원의 한 모퉁이에 세웠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31m를 기록하고 위도 35°14'55"N 경도 128°39'19"E에 위치한다. 유허비의 양쪽에는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와 『김차곤공金次坤公을 기리는 비碑』가 서 있다. 『창원 삼원지역의 지명과 옛 모습』에 의하면 지귀동에 지이포只耳浦가 있었다. 지귀知歸는 지이只耳의 또 다른 표기이다. 『경상도읍지』에 지귀리라는 표기로 등장한다. 지귀리는 동지이포東只耳浦 서지이포西只耳浦로 나뉘어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신촌리新村里, 동지이포東只耳浦, 서지이포西只耳浦 일부가 합쳐져 지귀리가 되었다. 신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은 지금의 늘푸른마을 코오롱아파트..

봉림동 상촌마을 유허비

상촌마을유허비 즉 『내고향 상촌땅』이라 새긴 비갈碑碣이 있는 곳은 창원대학교 학군단 옆, 의창구 퇴촌동 69번지이다. 구글 지도에서는 위도 35°14'56.0"N 경도 128°41'36.4"E에 위치한다. 상촌마을 유허비의 제목은 『내고향 상촌땅』이라 이름했다. 개인적으로 창원 원주민들이 세운 많은 옛터 비 또는 유허비 중에 가장 정겨움을 담은 비갈이라 생각한다. 비갈의 형태 모양은 빼고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다. 『내고향 상촌땅』이라는 제목을 단 상촌마을유허비갈의 전면과 뒷면에는 아래처럼 기록했다. 예로부터 이곳은 상촌上村(웃안골) 사람들의 터전이었다.기품있는 전단산旃檀山(精兵山), 거기에서 뻗어내린 누운등과 똥메산 자락이 마을을 아늑하게 감사고 있었다. 누운등 동쪽으로 용동이, 소자문(孝子門) 서남쪽으..

봉림동 퇴촌마을 옛터 비

퇴촌유허비退村遺墟碑 즉 『退村마을 옛터 碑』가 건설된 곳은 의창구 사림동 501-26번지 사림민원센터 한 모퉁이에 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9m를 기록하고 위도 35°14'31"N 경도 128°40'55"E에 위치한다. 『창원 삼원지역의 지명과 옛 모습』에 의하면 퇴촌리退村里은 『호구총수戶口總數』에 퇴촌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촌리上村里 상림리上林里 전부와 대봉림大鳳林 일부를 병합하였다. 퇴촌동退村洞은 1983년부터 사림동士林洞이라는 명칭의 법정동으로 바뀌었는데 창원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해 오면서 ‘퇴촌退村’이란 명칭이 퇴임한 재상이 물러나 사는 곳이란 의미가 있으므로 士(선비 사)+林(숲풀 림), 즉 선비가 숲처럼 많이 탄생하라는 의미로 바꾼 것이다. 어떤 학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