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200

진북 정현리 대현 김해김씨 표효각 表孝閣

진북면 정현리 564(대현길 12-1)번지 앞에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표효각表孝閣이 있다.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의 후손으로 아버지 김현호金顯昊를 극진히 모신 득명得命, 득추得秋, 득해得海 삼형제의 효성을 후대의 사람들이 본받기 바라며 세운 비각이다. 비각 입구의 협문은 삼악문三萼門이라 편액 했고 본각은 표효각表孝閣이라 이름했다. 表孝閣記 金得命字輝遠 有二弟 仲曰得秋字光遠 季曰得海字德天 金海人節孝公克一之后 父顯昊妣慶州金昌默女 以英廟己卯 金氏生伯于咸安竝谷坊鼎峴村 弟以戊子癸巳 而姜氏生仲季 自兒時兄弟式好不知爲分刑也 迨其長成 幷心事親 養志養禮 一遵小學 父年八十遘瘧 八年委牀 三兄弟晨夕侍側間可曰惟思 雉炙蟹漿 時天寒無求路 三兄弟出門仰天而泣登山 有雉在前 臨溪水蟹自躍氷得面供之 病忽癒 里人咸曰異哉天出..

성주사 곰절의 금석문-남무아미타불마애비

『불모산성주사佛母山聖住寺』 표지석에서 옛길을 따라 걸어서 가다 보면 길 좌측에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새긴 마애비磨崖碑를 만난다.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람들의 이름과 화주化主 강등암姜藤巖의 업적을 새겨 두었다. ③의 해설을 붙이자면 비신碑身과 비개碑蓋는 제대로 갖추어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었으며, 『광서임진추光緖壬辰秋』라는 내용이 각자 되어 있어 고종 29년(1892) 가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 높이는 204cm, 비신 높이 133cm, 너비 105cm이다. ① 金鍾瑨 号杞泉 김종진 호기천-김종진은 기천이라 불렀다. ② 化主藤巖璨勛 화주등암찬훈 襢越同參僉貟 단월동참첨원 【주석】 화주는 조실祖室인 등암藤巖으로 이름이 찬훈璨勛이며 성은 강씨姜氏이다. 보시(단월襢越..

성주사 곰절의 경주이씨 마애석

2020.5.26. 성주사의 경주이씨 선산 표지석 성주사의 절집 쪽에 있는 개울의 큰 바위에는 경주이씨의 선산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의 해발 높이는 139m이고, 구글지도는 위치를 「위도 35°10'33.4"N 경도 128°43'03.7"E」를 가리킨다. 성주사 동종이 있는 곳에서 성주사탬플스테이를 하는 곳으로 내려서 좌측의 계곡 맞은 편을 보면 『경주이씨마애석慶州李氏磨崖石』이라 이름하는 마애석이 보인다. 철책을 어렵게 넘어서 그 내용을 보니 경주이씨 선산의 표지석으로 바위의 위쪽에 조부 방화芳華, 아버지 성률星律의 묘지가 있는 위치를 걸음의 수로 기록해 두었다. 이 마애석에 기록을 남긴 사람은 첫째 손자인 인식仁植과 둘째 손자인 인곤仁坤이며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1890년에 이 선산 표시석인..

성주사의 금석문-어수각 주변의 마애비군

어린시절 성주사 곰절은 내가 노는 놀이터처럼 다녔던 곳이다. 초등학교 때 봄·가을 모든 소풍은 오로지 성주사 곰절로 12번을 갔고 중학교 때에도 5번 소풍을 간 장소이다. 당시의 모습과 지금의 절 모습은 천지개벽天地開闢을 했다고 할 정도로 달라졌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당시에도 절 입구의 커다란 돌들에는 금석문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한자漢字인 관계로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아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읽어 보는 수준이다. ‘어수각御水閣’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금석문은 지금의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출입구의 변경으로 지금의 위치에 옮겨 두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바위에 새긴 글자들은 예전 그대로이다. 성주사 곰절 주위에는 이러한 금석문이 조금 더 남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