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 1263

내서읍 재령이씨 광음재 匡陰齋

내서읍 삼계리 1275-6(삼계로 268)에는 재령이씨의 재실인 광음재匡陰齋가 있다. 이곳은 해발 123m라 기록하고 위도 35°14'30.5"N 경도 128°28'53.5"E를 가리킨다. 이곳 광음재에는 광심정廣潯亭과 지직재志直齋를 모시고 있으며 옛 목조건물은 남루하여 철거하고 2015년 8월에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었다. 대문에는 사속문似續門이라 편액 했고 본당은 광음재匡陰齋라 이름했다. 방문했을 때 내부를 보지 못해 기문은 볼 수 없었서 『마산문화지』에 기록되어 있는 광음재기匡陰齋記를 옮겨 둔다. 사속문似續門 편액과 광음재匡陰齋 편액 및 주련은 백당白堂 정기헌鄭基憲(1886~1956)의 조카인 관재貫齋 정문석鄭文錫(1905-1997)이 쓴 글이다. 匡陰齋記 匡廬山在咸安郡東南隅 最爲秀麗 一支北走 爲山..

구산면 수정리 전주이씨 숭모재 崇慕齋

구산면 수정리 954(수정4길 41)에 위치 하는 전주이씨 숭모재崇慕齋는 가선공嘉善公 이제인李齊麟이을 향사하는 재실이다. 임곡산荏谷山 아래 자리한 이곳은 구글지도에서 「위도35°11'75"N 경도128°57'81.3"E」을 가르킨다. 『마산문화지』에는 숭모재崇慕齋의 사진을 잘못 넣어 두어서 2020년 2월 2일에 탐방을 하고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고 숭모재崇慕齋의 건물이 이 사진 속의 건물임을 확신하게 됐다. 당시에 숭모재崇慕齋에는 기문記文이 걸려 있지 않아 내용을 몰랐는데 그 기문을 아래에 옮겨 둔다. 崇慕齋記 五世則禮當裰忌祭故 於是乎有墓祭焉 旣祭墓則不可無齊宿之所故 於是乎有菴焉 以寓追慕之誠 此天理人情之不容已者也 豈不懿哉 古龜山鎭之南荏谷山下 有村 曰水晶 李之全州氏 居之 我太宗王弟二..

구산면 반동 밀양박씨 경모재 景慕齋

구산면 반동리 316-2(양평길 69)에 위치하는 밀양박씨 경모재景慕齋는 농은공聾隱公 박진용朴振龍 선조를 모시는 재실齋室이다. 이곳은 위치기반 고도계가 해발 8m를 표시하고, 「위도35°05'03"N 경도128°35'01"E」이다. 솟을 삼문에는 경돈문敬敦門이라 편액 했고 본실에는 경모재景慕齋라 이름했으며,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고, 문소聞韶 김황金榥이 쓴 경모재중수기와 광주 노근용盧根容이 쓴 경모재중건상량문景慕齋重建이 걸려 있다. 아래에는 경모재중건기景慕齋重建記의 원문과 해문을 옮겨 둔다. 戶納潯江霽月 호납심강제월 [해문] 백촌-김창현 집앞에는 심양강의 맑은 달 받아드리고 學受松翁妙訣 학수송옹묘결 배움은 송옹선생묘한 비결 얻었도다 軒迎栗里淸風 헌영율리청풍 율리 마을 난간에서 맑은 바람 맞이하고 家傳杏..

남화경 南華經-장자 莊子/소요유 逍遙遊 2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 而徵一國者, 其自視也, 亦若此矣. 而宋榮子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境, 斯已矣. 彼其於世, 未數數然也. 雖然, 猶有未樹也. 夫列子御風而行, 泠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辨, 以游無窮者, 彼且惡乎待哉! 故曰 그러므로 대체로 지혜가 겨우 한 관직이나 담당할 만하고 행동이 그 고을 사람에게만 칭찬받을 정도이며, 덕은 그 나라 한 임금의 비위에나 맞는 정도라서, 한나라의 신하로 임명된 자가 스스로 뽐내는 것은 이 종달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송영자宋榮子¹⁾는 오히려 이들을 비웃는다. 그는 온 세상이 그를 칭찬해도 으스대는 법이 없고, 온 세상이 그를 ..

남화경 南華經-장자 莊子/소요유 逍遙遊 1

適莽蒼者三飡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宿舂糧 適千里者 三月聚糧 之二蟲又何知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奚以知其然也 가까운 들판으로 가는 자는 세 끼만 먹고 돌아와도 배가 여전하지만, 백리를 가는 사람은 전날 밤부터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를 가는 자는 3개월 동안의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니, 이 두 동물이(매미와 메까치) 또 어찌 알겠는가! 작은 지식은 큰 지식에 미치지 못하고, 작은 햇수는 큰 햇수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 그러한 것을 알겠는가?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此小年也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此大年也 而彭祖乃今以久特聞 眾人匹之 不亦悲乎 아침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와 땅강아지는 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작은 햇수이다. 초나..

고성군 금산리 제말장군과 증손 제명철의 정려각

고성군 대가면 금산리 가동마을 입구인 대가면 금산리 676-10번지에는 정려각旌閭閣이 있는데 문에는 쌍정문雙旌門이라 편액했고 정려각旌閭閣의 정면에는 충효각忠孝閣이라 편액했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63m라 기록하고 위도 35°01'51"N 경도 128°18'29"E를 가리킨다. 정려각은 맞배지붕 와가로 세 개의 기둥을 세우고 두 개의 실室로 구분하여 좌측 실室은 제말장군諸沫將軍¹⁾의 충절을 기리는 곳으로 하고 우측 방은 그의 증손인 제명철諸命喆의 효행정절孝行貞節을 기리는 방으로 했다. 따라서 문의 이름을 두 개의 정려旌閭를 받은 곳이라는 이름의 쌍정문雙旌門이라 편액한 것으로 보인다. 【주석】 제말장군諸沫將軍¹⁾ : 제말 장군의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제조 겸. 어머니는 공주 황씨로 1567년 고성에..

아송雅誦-백록동부白鹿洞賦

賦 白鹿洞賦 白鹿洞賦者 洞主晦翁之所作也 翁旣復作書院 洞中又賦其事 以示學者 其詞曰 承皇后之嘉惠 宅廬阜之南畺 閔原田之告病 惕農扈之非良 粵冬孟之旣望夙余駕乎山之塘 徑北原以東騖 陟李氏之崇岡[地名李家山] 揆厥號之所繇得頹址於榛荒 曰昔山人之隱處 至今永久而流芳[陳舜兪廬山記云 唐李渤字濬之與兄涉偕隱白鹿洞 後爲江州刺史 乃卽洞創臺榭 環以流水 雜植花木 爲一時之勝景也] 自昇元之有土 始變塾而爲庠 儼衣冠與絃誦 紛濟濟而洋洋[廬山記 又云南唐昇元中 因洞建學館 置田以給諸生 學者大集 乃以國子監九經李善道 爲洞主掌其敎授 江南野史亦云 當時謂之白鹿國庠] 在叔季而且然矧休明之景運 皇穆穆以當天 一軌文而來混 念敦篤於化原 乃搜剔乎 遺遯肦黃卷以置郵 廣靑衿之疑問 樂菁莪之長育 拔雋髦而登進[謹按國朝會要 太平興國二年 知江州周述 乞以九經 賜白鹿洞 詔從其請 仍驛送之 六年..

아송 雅誦

1799년(정조 23)에 정조正祖가 주희의 문집인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시와 운문韻文 415수를 선별하여 편찬·간행한 시선집이다. 정조가 직접 『주자대전』에서 시를 선별하고 서문(序文)을 썼으며, 신하들에게 교정을 하고 주석(註釋)을 붙여 금속활자[壬辰字]로 간행하도록 했다. 1799년 9월 15일 주희의 탄일誕日에 맞추어 제1권의 간행을 시작하여 같은 달 25일에 총 8권을 완간하였다. 정조는 인간(印刊)된 『아송』을 각 관서官署와 주요 서원書院 및 편찬에 참여한 관료 등에게 반사하고, 또 번각본飜刻本을 제작하여 전국의 향교鄕校 등에 널리 배포하였다. 내가 소장한 책은 필사본으로 가로 155cm, 세로 235cm의 크기이고 권두에는 정조가 쓴 「어제아송서御製雅誦序」, 책의 취지와 체재를 밝힌 「아송의..

남화경 南華經-장자 莊子

≪남화진경 南華眞經≫ 또는 ≪장자남화경 莊子南華經≫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름은 ≪장자≫였으나 당나라 현종(玄宗)이 천보(天寶) 원년(742)에 존경하고 숭상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 때 장주에게도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존호(尊號)가 붙여졌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경사편(經史篇) 도장류(道藏類)에 따르면 ‘남화’라는 명칭은 장자가 살던 마을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여러 가지 판본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곽상주(郭象注) 33권이 정통본으로 인정되고 있다. 최근에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당나라 필사본과 북송 여혜경(呂惠卿)의 여관문진장자의본(呂觀文進莊子義本), 일본 경도(京都)의 다카야마사(高山寺)에서 발견된 필사본이 있으나 모두 완전하지 못하다. 내용은 내편..

함양 김해김씨 청계서원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669-1번지에 위치하는 청계서원靑溪書院은 인접한 남계서원灆溪書院으로 인해 오히려 알려지지 못한 경우이다. 거의 모든 방문객들이 세계의 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만 방문하고 청계서원으로는 잘 가지 않는다. 몇 번의 방문에도 청계서원을 답사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다른 분들이 남계서원에서 해설을 듣는 동안 홀로 청계서원을 방문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6호로 등재된 청계서원靑溪書院은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1464∼1498)을 기리는 서원이다. 1861년 청계정사靑溪精舍를 유지에 세웠고 1921년 중건하면서 청계서원靑溪書院이라 했다. 인접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은 남계천灆溪川 앞에 세웠다고 이름했는데 청계靑溪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남계灆溪보다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