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 1263

연계안 蓮桂案 - 사마재제명록서

司馬齋題名錄序 吾鄕。素稱文獻之區。凡自鄕而升於國學者。立司馬齋之號。蓄貨帑以資其費。隸徒夫以供其役。講信於春秋。而相保於吉凶。其一鄕斯文之美意。何其尙哉。第恨會游無其所。常僑於他宇。記名又闕。其案在後而無可徵。余每與同志者歉焉。旣而。自思曰。營度在吾儕力微。誠無所容。其謀錄案則顧前輩未遑耳。苟一日有志。則可不煩而就焉。今之中外庶司。皆有題名記。所以徵于前而傳諸後也。今此司馬之齋。雖非百司之比。亦吾鄕斯文之一好事。而今之參于是者。皆一鄕之先輩也。後之迹于是者。亦一鄕之後輩也。其間。又有後裔而踵其祖先者焉。如是而可無題名之案。使之沒焉無傳哉。世逖人遐。不能盡記。始于宣德丙午之榜。以迄于今。凡若干人。繼此來者雖千百人。亦當續書。傳之不朽也。若夫備繕館宇。大張其規模。則又竢夫後之有力者勉焉。時嘉靖庚子(1570,선조3)夏抄下澣。西河盧禛。序。 司馬齋有司之任傳以榜次厥惟舊哉 歲在乙未冬盧君..

창원시 웅천 괴정마을 신당

진해구 제덕동 170번지에는 괴정마을 신당神堂인 당집이 위치한 곳으로 GPS고도계는 해발 26m를 기록하고 위도 35°05'562"N 경도 128°44'42"E를 가리킨다. 괴정槐井마을은 조선시대 삼포왜란의 중심지인 왜관이 있던 제포薺浦 즉 냉이개의 선창이 있던 곳으로 바깥지개라 불렀던 곳이다. 당집의 주위에는 팽나무 노거수가 도열한 형태이고 당집 바로 위쪽엔 느티나무가 있다. 당집은 마을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밖에는 낮은 콘크리트 담장이 조성되어 있고, 당집은 측면 1칸, 정면 1칸의 금속기와로 벽체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당산제는 할매신, 할배신, 신목에 매년 음력 1월 1일에 지내며, 제관은 마을사람 중에 不淨(부정)없는 50대 이상의 남자를 선정했었다. 선정된 제관들은 당산제가 있기 7일 전에..

창원시 웅천 제포진 신당

진해구 제덕동 548번지는 제포성지薺浦城址의 두 정상부 중 한 곳으로 GPS고도계는 해발 42m를 기록하고 위도 35°06'22"N 경도 128°44'30"E를 가리킨다. 이곳은 제포성지의 북쪽 옹성이 자리하는 곳으로 성벽의 안쪽에 제덕동의 신당神堂이 있다. 당집의 앞쪽에는 느티나무를 심었고 둘레에는 아름 들이 곰솔이 빙둘러 있으며, 당집의 뒤쪽은 푸조나무 1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신당은 시멘트블록으로 담장을 하고 시멘트블럭으로 집을 지었으며 일본식 시멘트기와를 이었다. 당집의 문에는 흰바탕에 태극문양을 하여 강력한 느낌을 준다. 현재 마을에서 제祭는 지내지 않고 있으며 뒤쪽의 지붕은 내려앉아 비가 당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제포성의 만호가 제주祭主가 되어 정성을 다해 제祭를 올..

진북면 내추리 해주오씨 농은정 農隱亭

진북면 추곡리 123-2(내추길 1)에는 해주오씨의 재실齋室인 농은정農隱亭이 있다. 어은부군漁隱府君의 막내동생인 농은공農隱公 국명國命 이곳에 거주하므로서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광려산이 서쪽 자락을 깊숙이 연 곳에 자리한 내추內秋마을은 마을에 일이 없고서는 갈 일이 없는 산골짝이다. 마을 입구에는 추곡저수지가 자리하고 있어 한적하지만 경관이 좋은 곳이다. 농은정農隱亭의 대문에는 숭덕문崇德門이라 편액했고 4기둥에는 주련을 달았으며 내부에는 농은정기農隱亭記와 농은정상량문農隱亭上樑文 및 원운과 차운시 3편도 있다. 農隱亭記 余嘗聞停者停之義也 凡人之停 留有若山水之渟 聚而山水之渟也 自有靈境人之停也 必有遺蹟理勢之固然也 而必地得其人人得其地然後 乃可以名於世而傳於後矣 人地相得兩宜者 昔我族先祖 農隱公諱國命 是己盖公 卽我八..

진북면 대티마을 김해김씨 죽림재 竹林齋

진북면 대티리 790(대티1길 125)번지는 김해김씨의 재실齋室인 죽림재竹林齋가 있는 곳이다. 처음 대티마을에 이주한 분은 김우개金宇豈이고, 죽림재竹林齋를 창건한 분은 김무조金武祚라고 교남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후 병화로 불타 없어졌으나 후손들이 1986년 7월에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대문에는 세심문洗心門이라 편액 했고, 재실은 죽림재竹林齋라 이름했다. 마당의 한켠에는 연못을 만들어 경관을 중시했고 주련을 달았다. 문이 잠겨 있어 내부의 기문은 보지 못했지만 『마산문화지』에 그 내용이 있어 아래에 옮겼다. 竹林齋重建記 구진해현舊鎭海縣의 북쪽 대티大峙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세장世庄으로 이곳에 처음 들어와 세거世居의 터를 닦으신 어른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휘諱 우개공宇豈公이시고 통훈공通訓公의 손자에 통..

진북 대티리 중촌마을 황래성 공덕비

진북면 대티리 237번지 중촌마을 입구에는 일맥一麥 황래성黃來性 공덕비功德碑가 세워져 있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99m를 기록하고 위도 35°10'18"N 경도 128°28'13"E를 가리킨다. 이 공덕비는 황래성공黃來性公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무릅이 헤어진 옷을 기워 입으면서도 마을의 발전과 장학사업을 위해 노력했던 근면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공덕비의 뒷면에는 공적을 기록했는데 아래와 같다. 일맥황래성공덕비一麥黃來性功德碑 공公은 서기 1914년 6월 3일 삼계三溪 창원황공昌原黃公 백수씨伯秀氏의 장남長男으로 이 고장에서 태어나 일찍이 뜻을 세워 고향故鄕을 떠나 오직 성실誠實과 근면勤勉으로 사업事業을 이끌어 오면서 언제나 내 고장을 잊지않고 장학사업獎學事業을 ..

봉림동 지귀·신촌 유허비

지귀·신촌유허비知歸·新村遺墟碑는 『지귀·신촌 옛터』라는 이름으로 의창구 봉곡동 5번지 효자공원의 한 모퉁이에 세웠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31m를 기록하고 위도 35°14'55"N 경도 128°39'19"E에 위치한다. 유허비의 양쪽에는 『김해김씨부자포효비金海金氏父子褒孝碑』와 『김차곤공金次坤公을 기리는 비碑』가 서 있다. 『창원 삼원지역의 지명과 옛 모습』에 의하면 지귀동에 지이포只耳浦가 있었다. 지귀知歸는 지이只耳의 또 다른 표기이다. 『경상도읍지』에 지귀리라는 표기로 등장한다. 지귀리는 동지이포東只耳浦 서지이포西只耳浦로 나뉘어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신촌리新村里, 동지이포東只耳浦, 서지이포西只耳浦 일부가 합쳐져 지귀리가 되었다. 신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은 지금의 늘푸른마을 코오롱아파트..

봉림동 상촌마을 유허비

상촌마을유허비 즉 『내고향 상촌땅』이라 새긴 비갈碑碣이 있는 곳은 창원대학교 학군단 옆, 의창구 퇴촌동 69번지이다. 구글 지도에서는 위도 35°14'56.0"N 경도 128°41'36.4"E에 위치한다. 상촌마을 유허비의 제목은 『내고향 상촌땅』이라 이름했다. 개인적으로 창원 원주민들이 세운 많은 옛터 비 또는 유허비 중에 가장 정겨움을 담은 비갈이라 생각한다. 비갈의 형태 모양은 빼고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다. 『내고향 상촌땅』이라는 제목을 단 상촌마을유허비갈의 전면과 뒷면에는 아래처럼 기록했다. 예로부터 이곳은 상촌上村(웃안골) 사람들의 터전이었다.기품있는 전단산旃檀山(精兵山), 거기에서 뻗어내린 누운등과 똥메산 자락이 마을을 아늑하게 감사고 있었다. 누운등 동쪽으로 용동이, 소자문(孝子門) 서남쪽으..

봉림동 퇴촌마을 옛터 비

퇴촌유허비退村遺墟碑 즉 『退村마을 옛터 碑』가 건설된 곳은 의창구 사림동 501-26번지 사림민원센터 한 모퉁이에 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9m를 기록하고 위도 35°14'31"N 경도 128°40'55"E에 위치한다. 『창원 삼원지역의 지명과 옛 모습』에 의하면 퇴촌리退村里은 『호구총수戶口總數』에 퇴촌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촌리上村里 상림리上林里 전부와 대봉림大鳳林 일부를 병합하였다. 퇴촌동退村洞은 1983년부터 사림동士林洞이라는 명칭의 법정동으로 바뀌었는데 창원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해 오면서 ‘퇴촌退村’이란 명칭이 퇴임한 재상이 물러나 사는 곳이란 의미가 있으므로 士(선비 사)+林(숲풀 림), 즉 선비가 숲처럼 많이 탄생하라는 의미로 바꾼 것이다. 어떤 학자는..

봉림동의 대봉림유허비

『대봉림유허비大鳳林遺墟碑』가 건설된 곳은 의창구 사림동 85-1번지 느티어린이공원의 한 모퉁이에 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9m를 기록하고 위도 35°14'46"N 경도 128°40'43"E에 위치한다. 이 유허비는 소봉림동유허비와 거의 동일한 형식을 취했고 자연석인 비신에 『유지불망비遺址不忘碑』라 새긴것만 다르다. 봉림리鳳林里에 대한 『창원 삼원지역의 지명과 옛 모습』에는 봉림리의 ‘봉림鳳林’은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봉림사鳳林寺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봉림사는 봉림산鳳林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봉림사는 봉림산에 있다. “鳳林寺在鳳林山”이라는 기록은 전통 지리서에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봉림리는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지리서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는 남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