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 1263

소봉림유허비 관리 않으려면 왜 만들어

『소봉림유허비小鳳林遺墟碑』가 건설된 곳은 의창구 봉림동 502번지이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8m를 기록하고 위도 35°15'10"N 경도 128°40'00"E에 위치한다. 이 유허비遺墟碑는 지대석 위에 비좌碑座를 놓고 그 위에 자연석 비신碑身에 음각으로 새긴 비갈碑碣의 모양을 하고 있다. 비좌를 대형으로 만든 것은 그곳에 마을의 유래와 역사적 기록을 적은 판을 붙여두기 위함인 것으로 파악되며 2011년 2월에 사단법인 삼원회가 발행한 『창원 삼원지역의 지명과 옛 모습』에는 45개의 유허비가 실렸는데 15기의 마을 유허비가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다. 소봉림유허비의 기록 내용은 따로 옮기지 않고 위 사진으로 대신한다. 봉림동鳳林洞의 유래를 살펴보면 봉림산鳳林山 봉림사鳳林寺가 있었기에 지명 이름이 등장했..

불모산동과 불모산동유허비

불모산동佛母山洞의 옛터 비갈이 위치한 곳은 성산구 성주동 545-1번지 일대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07m를 기록하고 위도 35°11'21"N 경도 128°43'30"E이다. 비석은 비단을 만들어 그 단에 유래와 연혁을 적었고 기단상부를 연화무늬로 조각하여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그 위에 받침돌을 얻어 자연석이 안정되도록 하여 자연석에 제목을 새겼다. 자연석인 비갈의 전면에는 『불모산동 옛 터』를 새기고 뒷면에는 『불모산동유허비佛母山洞遺墟碑』라는 글을 음각으로 새겼다. 불모산동은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불모산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당시 남면 도상삼운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불모산리가 본래부터 이름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불모산佛母山에서 마을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

의창구 사화동 신목과 신당

창원시의 도심 속에 현재까지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이 함께 존재하는 곳은 사화공원 부지 내 위치한 옛 사화동의 신목과 신당 뿐이다. 신목의 존재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찾아보지 못했는데 우연히 보여준 박회장의 사진 한 장이 구미를 당겼다. 대략의 위치을 알게 됐고 7월 10일 이곳을 방문하여 신목과 신당을 촬영하고 내부는 보지 못한 채 아쉬움을 가지고 돌아섰다. 신당과 신목 사이에 작은 유리상자를 두고 그 속에 촛불을 피워 둔 것으로 볼 때 지금도 매일 기도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듯했다. 사화동 신목이 위치한 곳은 등명산 자락의 남쪽 지역으로 옛 사화마을 위쪽 산 중턱에 위치한다. 지금은 사화동이라는 마을은 사라지고 신목과 신당만이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이곳의 해발고도는 40m이고 위..

북면 월백리 의령남씨 모목재 慕睦齋

의창구 북면 월백리 447-1(백월로277번길 16-7)은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재실齋室인 모목재慕睦齋가 위치한 곳이다. 모목재는 임진왜란 후 경기도에서 이곳 월백리로 은둔한 둔일遯逸 남분南玢을 제향하는 곳으로 400여년이 흐른 후 1964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대문에는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가 쓴 추열문追悅門 편액이 걸렸고 본실은 모목재慕睦齋라 했으며 5개의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는 부인찬미문夫人贊美文과 모목재기慕睦齋記 및 모목재상량문慕睦齋上樑文 등이 걸려 있다. 海山 李殷春 睦於同族慕其先 일가끼리 화목하고 그 선조 생각하는 慕睦高名亘萬年 모목慕睦이라는 높은 이름 만년을 이어가리 依舊家規敦孝友 오래된 가문의 법도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고 至今村俗襲淳全 지금까지 마을 풍속 순수하고 온전하게 이..

삼정자 외리마을 옛터 비갈과 수월재 각석

성산구 삼정자로51번길 15(성주동 128-2)는 성주민원센터 뒤편 삼정자경로당 앞 공터이다. 이곳의 해발 높이를위치기반고도계는 76m, 좌표는 35°11'57"N 128°42'41"E를 가리킨다. 이곳에 옛 삼정자 외리마을의 흔적을 남겨 실향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옛 마을의 역사적 가치와 지리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지리적 표석이 되는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해 세워둔 곳이다. 삼정자三丁子 외리外里마을은 창원시가 개발된 후에도 한참 동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2012년 공단의 배후 도시로 완전히 편입되어 개발된 곳이다. 그러다 보니 늦게 유허비가 서게 되었고 위치적으로도 그 지표의 구실을 잘하게 됐다. 내가 어릴 때에는 3개의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있다고 해서 삼정자三亭子라고 알고 있었다. 실재로 정자..

불모산 성주사 사적비명

성주사비석군聖住寺碑石群이 위치한 곳은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산 213-2번지로 이곳의 해발고도는 135m이고 위치기반 고도계는 「위도35°10'35"N 경도128°42'59"E」이다. 이곳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 공덕비문』을 비롯하여 전면에 『성주사중수급사적비성금인방명기聖住寺重修及事蹟碑誠金人芳名記』와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 『임춘옥유공비林春玉有功碑』 및 『자연보호비自然保護碑』 등 5기의 비석이 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는 뒷면에 『창원군불모산성주사사적비명병서昌原郡佛母山聖住寺事蹟碑銘 並書』가 기록되어 있고 비의 형태는 이중 대석臺石에 개석은 없고 비신만 있는 형태이다. 맨 아래 대석은 너비 91cm, 폭 61cm이고 위의 대석은 너비 46cm, 폭 40cm이며, 비..

열부유씨전

傳 書烈婦柳氏傳 孺人姓 柳氏 籍文化 考諱道權 祖諱漢運 曾祖諱震華通德郞 英廟丁亥 孺人生 自幼服習孝友 及長歸于士人蓬山鄭公諱埈 時尊舅已下世 尊姑郭氏在堂 孺人晨起問寢恭執婦道 其在奉養甘旨之節 皆以適志 事君子以禮 睦宗親以道 不幸 甲寅歲 所天爲酷吏李汝節之陰中 無辜致刑以至將死 孺人汲水寒泉祝天代命 時則十月日也 夜半半月初上 人自堀嶺來 心先驚動問 果訃坪也 寃乎慟矣 初終以禮 志欲按劒入官庭復讐 而爲尊堂所沮未果 又欲數次結項下從 而爲尊姑救解伺守 僅保殘命矣 適有慰諭使 自京下來 故切望雪寃之有 便始進粥飮挻身跋涉 自金海熊川 抵于本邑安民驛站 入庭哀訴 庶有矜恤之意 入府經宿後 頓無啓聞之意 而尙有萬一之望 仍隨上京爲計 家有幼嬌 時方三歲 婢季心 抱隨窟峴 孺人食乳誘曰 汝欲從我 則割乳與之 卽拔劒倚乳 雖三歲乳兒 尙知圖事泣而下膝 向季心背上 見者莫不涕淚焉 ..

성주사 중흥조 등암대종사 공덕비와 백당선생 글씨

성주사비석군聖住寺碑石群이 위치한 곳은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산 213-2번지로 이곳의 해발고도는 135m이고 위치기반 고도계는 「위도35°10'35"N 경도128°42'59"E」이다. 이곳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 공덕비문』을 비롯하여 전면에 『성주사중수급사적비성금인방명기聖住寺重修及事蹟碑誠金人芳名記』와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 『임춘옥유공비林春玉有功碑』 및 『자연보호비自然保護碑』 등 5기의 비석이 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들 중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의 글씨를 쓴 분이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로부터 추서를 받지도 못한 백당白堂 정기헌鄭基憲선생이다. 비좌규수碑座珪首의 형태를 가진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는..

성주사 곰절의 금석문-성주사부도군

성주사부도군聖住寺浮屠群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산 213-2번지의 성주사聖住寺 가는 초입의 길옆에는 돌을 다듬어 축대 놓고 계단을 만든 후 다시 축대를 쌓고 산지를 평면으로 만들고 전면이 트인 ㄷ자 형태의 담장을 하여 그 안에 부도 4기와 비 1기를 옮겨 두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30m이고 위치기반 고도계는 「위도35°10'43"N 경도128°42'54"E」이다. 『성주사부도군聖住寺浮屠群』이라 불리는 부도들 중 2기는 부도군의 아래쪽에 있었던 용화사龍華寺라는 옛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인데 정확히는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다. 근래에 만든 종모양의 부도에는 『정복덕행鄭福德行』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정복덕행鄭福德行』 부도의 뒤쪽에는 종모양 부도가 받침대가 없는 상태인데 이 부도는 『화봉당·경오대사화덕성花..

성주사 곰절의 금석문-홍종영마애불망비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산 213-2번지의 성주사聖住寺 가는 길옆에는 자연 거석의 일부를 비석의 형태로 다듬어 글을 새긴 마애석이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32m이고 위치기반 고도계는 「위도35°10'35"N 경도128°42'58"E」이다. 『성주사 나무아미타불마애비』에서 절 방향으로 약 20m쯤 위쪽 길 좌측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는 야생차나무가 조금 서식한다. 그 차나무 바로 뒤쪽은 큰 암석이 절벽을 이루고 있다. 이 암석은 시누대가 앞을 가려 암석에 새긴 글씨가 숨겨져 있었다. 옛 기억을 더듬어 이 암석을 찾고 자세히 살피니 『홍종영마애불망비洪鍾永磨崖不忘碑』라 불리는 마애비가 보였다. 차량에서 낫을 가져와 시누대를 베어내고 글씨가 잘 보이도록 했다. 이 암석에는 3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