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 1252

국역 열하일기 熱河日記

『국역 열하일기 熱河日記』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1780년에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이다.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음에도 사절단으로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조의 부마로,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이다. 박지원朴趾源박지원朴趾源은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하고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熱河의 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 장성..

고산부락유허비 高山部落遺墟碑

부락部落이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왜구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하여 미국의 점령시기인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행정기록에서 사용되었다가 이후 사라진 줄만 알고 있었는데, 이 용어가 2005년 1월에 창원지역의 옛 마을을 기억하자는 금석문인 기림비에 새겨두어 놀라웠다. 대체 자신들의 마을을, 마을 사람 스스로가 자신들의 기록으로 비참한 뜻을 지닌 “부락部落”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 금석문에 새긴 글은 천년이 지나도 뚜렷하게 남아있다는 점에서 함부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고 신중하게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의 오류이지만 기록을 훼손하지 않으면 그것이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部落”이란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에게 전한 용어로 그 뜻은 “백정, 부랑인, 불치전염병보균자, 전쟁포로, 정신적으로 이상한..

고문서집성 76 古文書集成 七十六

『古文書集成 七十六』은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220(초동로 398-13)의 밀성박씨密城朴氏 소유인 덕남서원德南書院에 있던 고문서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2004년 영인본으로 만든 책으로 원문만 실었다. 이 책의 해제에는 박익朴翊으로 시작하는 덕남서원의 가계도가 있는 고문서 해제 전문을 기록한 곳이 있어 링크를 걸어둔다. 밀양 신호 밀성박씨 덕남서원 책은 양장본으로 가로 194cm, 세로 264cm이며 743p이다. 발행인은 윤덕홍尹德弘이고 편집은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가 했고, 발행은 한국정신문화원이며, 인쇄는 ㈜뿌리문화사에서 2004년 10월 20일에 간행했다. 이 책은 2023년 7월 19일 행운서점에서 삼만원에 구입해 소장하게 됐다.

三足堂先生逸稿 삼족당선생일고

『국역 증보 三足堂先生逸稿 삼족당선생일고』는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1479~1552)의 시문을 모아 만든 책으로 권두에 사진으로 2001년 준공한 유현재惟賢齋, 1519년에 창건한 삼족대三足臺, 삼족당과 부인 벽진이씨의 묘소, 청도군 매전면의 삼족대를 감싸 안은 우연愚淵, 선생의 유묵, 1518년 창건하고 김일손을 모신 자계서원紫溪書院, 사동서원社洞書院, 광주의 임계서원臨溪書院을 넣고, 2013년 유현재종회장 김종화의 서문을 부쳤으며, 김용철, 김용건, 김창식의 축사와 김항식의 발간사를 비롯해 1963년 40세손 김재곤金載坤의 발문을 부쳐 간행했다. 1부에 시詩·부賦·사詞를 싣고, 2부는 발跋·묘갈명墓碣銘[原集], 3부는 부록으로 묘갈명·제문·만장·상향문·기문·상량문·가장·행장을 실었고, 4부는 년보..

晉州金石文總覽 진주금석문총람

『晉州金石文總覽』의 편집은 진주시사편찬위원회가 했으며, 간행은 동아인쇄출판사가 했고, 1995년 3월에 진주시가 발간했다. 진주시의 많은 금석문 중 일부를 정리한 『진주금석문총람』은 해석문은 많이 없이 원문을 옮겨 기록한 것으로 비석은 흑백사진으로 했고 세로글씨로 제작되었다. 권두에 진주시장 백승두白承斗의 서문과 진주시사편찬위원회가장 김동기金東基의 발간사를 부치고 촉석루에 위치해 있는 비각과 영남진주교궁이건사적비를 화보로 실었다. 책은 양장본으로 크기는 가로 194cm, 세로 266cm이며 371p이다. 이 책은 2023년 9월 6일 헌책방 ‘즐겨찾기’에서 만오천원에 구입해 소장하게 됐다.

松湖書院誌 全 송호서원지 전

『松湖書院 송호서원』은 남평문씨南平文氏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1122~1189)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1777(정조 1)년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 산 7(신성동2길 22-3)에 창건한 서원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2호이다. 『松湖書院誌 全 송호서원지 전』은 권두에 후손 문세훈文世勳의 서序와 충숙공 24세 문홍욱文洪煜의 발간사, 충숙공 25세 문병식文炳植의 소서小叙, 후손 문자환文子煥의 후기, 후손 문병춘ㅊ炳春의 발跋을 부치고 목차를 실은 다음 충숙공忠肅公의 묘도墓圖를 넣고 사진을 실었다. 사진은 충숙공영정忠肅公影幀을 싣고 송호사松湖祠, 송호서당松湖書堂, 동·서재, 봉양문, 사적비, 기념비, 관리사, 충숙공묘, 신도비, 금강재金岡齋 등을 실었다. 그리고 충숙공 이하 분파도와 시조 문다성文多省이하 충숙..

김해 송담서원과 표충사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 사충단(四忠壇)은 김해시 가야로405번안길 22-9(동상동 161)에 위치하며, 분산성(盆山城) 우측 계곡에 있다. 사충단은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김해부성(金海府城)을 지키다 전사한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 류식(柳湜)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 8년(1871) 왕명으로 건립한 묘단이다. 1995년 송담서원松潭書院과 표충사表忠祠를 국도시비(國·道·市費) 약20억원을 들여 복원했는데 비각 이외의 건물은 모두 신축하였다. 비각은 주심포식(柱心包式) 겹치마의 맞배지붕을 하고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 네 명의 충신을 용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에 향례享禮를 ..

충주 팔봉서원 八峰書院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達川은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에서 충주시 수안보에서 발원한 석문동천石門東川을 만나는데 수주팔봉이라 말하는 검암劍巖(칼바위)의 약한 암석을 뚫고 달천達川과 합류한다. 강을 사이에 두고 살미면 토계리의 검암劍巖(칼바위)이 대소원면 문주리를 휘돌아 가는 달천達川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문주리에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팔봉서원八峰書院을 남기고 탐금대彈琴臺에서 남한강을 만나 큰 강이 된다.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74-1에 위치한 팔봉서원八峰書院은 연산군 축출 이후 진보적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1819) 때 극형을 당하거나, 귀양 갈 때, 이곳으로 귀양 온 계옹溪翁 이자李耔(1480~1533)와 충주 용탄龍灘으로 낙향한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1484~1548)이 거룻배를..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에 위치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남한강 변에 있다. 통일신라가 중원을 평정하고 세운 7층석탑으로 절의 부속 건축물이 아니라 상징적 표식물로 건설됐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이 탑과 어우러질 만한 절터의 흔적이 인근에 없고 남한강의 영역 안에 있어 홍수에 대비하여 절을 지을 땅이 없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높다. 탑은 높이 14.5m에 비해 너비가 좁아 가늘게 치솟은 상승감이 두드러지는 탑이다. 또한 탑이 위치한 곳은 인근의 다른 곳 보다 높은 편인데 예전부터 이곳이 높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충주에서 보았을 때 표식이 될 높이로 탑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에 세워 놓은 안내판의 내용에는 “1817년 해체·복원 시 6층 탑신에서 훼손된 고서류와 ..

追敬閣事蹟誌 추경각사적지

『추경각사적지 追敬閣事蹟誌』는 황씨黃氏 도시조都始祖 황락黃洛의 제단비와 사적비를 비롯 유허지 숭덕사崇德祠와 창원황씨昌原黃氏 시조始祖 황충준黃忠俊의 묘지와 제례 공간인 추경각追敬閣의 기록과 황씨의 유래 등을 담은 것이다. 권두에 도시조都始祖 황락黃洛의 영정影幀과 사적비, 제단 등과 창원황씨 시조 황충준黃忠俊 신도비, 묘소, 세장비, 사적비, 추경각 등의 사진을 담았고 각종 편액을 실었으며, 종훈과 강령綱領 찬송讚頌을 부쳤으며 목차를 달고 대종회장 황명수黃明秀의 발간사, 중앙종친회 황경로黃慶老의 축사, 창원황씨 종손 황선광黃善光, 황인성黃寅性, 봉교공파 회장 황규삼黃圭三, 병사공파 회장 황규진黃圭珍의 축간사를 부쳤고, 황인성黃仁性, 황영선, 판사공파 회장 황연호黃延鎬의 추모사를 비롯해 황칠곤, 황연조黃演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