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책과 기록 245

적선집 謫仙集

春桂問答 봄 계수나무와의 문답 問春桂 봄 계수나무에게 묻기를 桃李正芳華 복숭아꽃 오얏꽃은 막 아름답게 피어 年光隨處滿 봄의 경치가 곳곳에 가득한데 何事獨無花 어쩐 일로 홀로 꽃이 없는가? 問春答 봄 계수나무가 답하기를 春華詎能久 봄꽃이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오 風霜搖落時 바람 불고 서리 내려 흔들려 떨어지는 때에 獨秀君知否 나 홀로 빼어남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遊子吟 집 떠나는 자식을 읆다. 慈母手中線 자애로운 어머니 손에 들린 실 遊子身上衣 집 떠나는 자식의 몸에 걸칠 옷 지으시네 臨行密密縫 떠나는 자식 옷 촘촘히 깁는 것은 意恐遲遲歸 더디 돌아올까 염려한 때문이라네 誰將寸草心 그 누가 말했나, ‘한마디 풀 같은 마음으로’ 報得三春暉 춘삼월 봄볕 같은 사랑을 어이 갚으랴 子夜吳歌 깊은 밤 장안에서 ..

고문진보 합초 古文眞寶 合抄-보연혜왕서 報燕惠王書

報燕惠王書 臣不侫 不能奉承王命 以順左右之心 恐傷先王之明 有害足下之義 故 遁逃走趙 今足下使人数之以罪 臣恐侍御者 不察先王之所以畜幸臣之理。又不白臣之所以事先王之心 故敢以書對 臣聞賢聖之君 不以禄私親 其功多者 賞之其能當者 處之故 察能而授官者 成功之君也。論行而結交者 立名之士也。臣竊觀先王之擧也。見有高世主之心 故 假節於魏 以身得察於燕 先王過擧 厠之貧客之中 立之群臣之上 不謀父兄 以爲亞卿臣竊不自知 自以爲奉令承教 可幸無罪 故 受令而不辞 先王 命之曰 我有積怨深怒於齊 不量輕弱而欲以齊爲事 臣曰 夫齊霸国之餘業而最勝之遗事也。練於兵甲 習於战攻 王若欲伐之 必與天下 圖之 與天下 圖之 莫若於结趙。且又淮北宋地 楚魏之所欲也。趙若許而约四国攻之 齊可大破也。先王 以爲然 具符節 南使臣於趙 顧反命 起兵擊齊 以天之道 先王之靈 河北之地 随先王而 擧之濟上 濟..

옥휘운고서 玉彙韻考序

옥휘운고서 玉彙韻考序 내용 목판본으로 인쇄한 이경우(李景羽)가 편찬한 운(韻) 중심의 한자어(漢字語) 해설서 「옥휘운고玉彙韻考」 단책單冊으로 권두에 『숭정기원후삼신미崇禎紀元後三辛未 이경우李景羽』의 서序와 권말에 上之十三(二)年 현익군탄玄黓涒灘(壬申 1812) 심정조沈鼎祖의 발跋이 있다. 권두의 序에 崇禎紀元後三辛未라고 되어 있어 1751년으로 계산이 되나 실은 崇禎紀元後四辛未인 1811년의 오기誤記인 것 같다. 크기 23.3×33cm 참고 옥휘운고玉彙韻考 규장각 해제 1811년 李景羽가 편찬하고 1812년 沈鼎祖가 간행한 韻書이다. 이는 李景羽의 序의 “崇禎紀元後三辛未(1811)”라는 내용‚ 沈鼎祖의 跋의 “上之十三年玄黙涒灘(壬申: 1812)”라는 내용‚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全城後人 李景羽纂輯 悉直後..

연계안 蓮桂案 - 사마재제명록서

司馬齋題名錄序 吾鄕。素稱文獻之區。凡自鄕而升於國學者。立司馬齋之號。蓄貨帑以資其費。隸徒夫以供其役。講信於春秋。而相保於吉凶。其一鄕斯文之美意。何其尙哉。第恨會游無其所。常僑於他宇。記名又闕。其案在後而無可徵。余每與同志者歉焉。旣而。自思曰。營度在吾儕力微。誠無所容。其謀錄案則顧前輩未遑耳。苟一日有志。則可不煩而就焉。今之中外庶司。皆有題名記。所以徵于前而傳諸後也。今此司馬之齋。雖非百司之比。亦吾鄕斯文之一好事。而今之參于是者。皆一鄕之先輩也。後之迹于是者。亦一鄕之後輩也。其間。又有後裔而踵其祖先者焉。如是而可無題名之案。使之沒焉無傳哉。世逖人遐。不能盡記。始于宣德丙午之榜。以迄于今。凡若干人。繼此來者雖千百人。亦當續書。傳之不朽也。若夫備繕館宇。大張其規模。則又竢夫後之有力者勉焉。時嘉靖庚子(1570,선조3)夏抄下澣。西河盧禛。序。 司馬齋有司之任傳以榜次厥惟舊哉 歲在乙未冬盧君..

열부유씨전

傳 書烈婦柳氏傳 孺人姓 柳氏 籍文化 考諱道權 祖諱漢運 曾祖諱震華通德郞 英廟丁亥 孺人生 自幼服習孝友 及長歸于士人蓬山鄭公諱埈 時尊舅已下世 尊姑郭氏在堂 孺人晨起問寢恭執婦道 其在奉養甘旨之節 皆以適志 事君子以禮 睦宗親以道 不幸 甲寅歲 所天爲酷吏李汝節之陰中 無辜致刑以至將死 孺人汲水寒泉祝天代命 時則十月日也 夜半半月初上 人自堀嶺來 心先驚動問 果訃坪也 寃乎慟矣 初終以禮 志欲按劒入官庭復讐 而爲尊堂所沮未果 又欲數次結項下從 而爲尊姑救解伺守 僅保殘命矣 適有慰諭使 自京下來 故切望雪寃之有 便始進粥飮挻身跋涉 自金海熊川 抵于本邑安民驛站 入庭哀訴 庶有矜恤之意 入府經宿後 頓無啓聞之意 而尙有萬一之望 仍隨上京爲計 家有幼嬌 時方三歲 婢季心 抱隨窟峴 孺人食乳誘曰 汝欲從我 則割乳與之 卽拔劒倚乳 雖三歲乳兒 尙知圖事泣而下膝 向季心背上 見者莫不涕淚焉 ..

창원대도호부 탄생 기록 근거

창원지역이 대도호부였다는 것은 창원인의 자부심이라 많은 분들의 글에 인용되어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의 기록이 어디에 실려 있는지 밝혀 둔 곳이 없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조선시대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가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로 되었다는 기록들은 모두가 인용하는 바이나 실재 그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는 잘 기록되어 있지 않아 혹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왕조실록 등을 살폈으나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끝에 “교남지(嶠南誌)”에 실려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근대도지(韓國近代道誌)” 중 교남지권지칠십일(嶠南誌券之七十一)편을 찾아보니 창원부(昌原府)편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창원향교 편액들을 옮겨 적고 해문 하는 과정에서 순조 3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