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책과 기록 253

옥휘운고서 玉彙韻考序

옥휘운고서 玉彙韻考序 내용 목판본으로 인쇄한 이경우(李景羽)가 편찬한 운(韻) 중심의 한자어(漢字語) 해설서 「옥휘운고玉彙韻考」 단책單冊으로 권두에 『숭정기원후삼신미崇禎紀元後三辛未 이경우李景羽』의 서序와 권말에 上之十三(二)年 현익군탄玄黓涒灘(壬申 1812) 심정조沈鼎祖의 발跋이 있다. 권두의 序에 崇禎紀元後三辛未라고 되어 있어 1751년으로 계산이 되나 실은 崇禎紀元後四辛未인 1811년의 오기誤記인 것 같다. 크기 23.3×33cm 참고 옥휘운고玉彙韻考 규장각 해제 1811년 李景羽가 편찬하고 1812년 沈鼎祖가 간행한 韻書이다. 이는 李景羽의 序의 “崇禎紀元後三辛未(1811)”라는 내용‚ 沈鼎祖의 跋의 “上之十三年玄黙涒灘(壬申: 1812)”라는 내용‚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全城後人 李景羽纂輯 悉直後..

연계안 蓮桂案 - 사마재제명록서

연계안[정의] 고려 후기부터 근대 개항기까지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의 역대 소과 및 대과 합격자 명단. [개설] 연계(蓮桂)는 연방(蓮榜)과 계방(桂榜)을 합하여서 일컫는 말이다. 소과인 생원과 진사에 급제한 것을 연방, 대과에 급제한 것을 계방이라고 한다. 연계안은 소과와 대과에 급제한 인물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이다. 인물 명단에는 본관, 과거 합격 연대, 관직, 거주지 등을 아울러 기록하고 있다. [저자]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 『연계안(蓮桂案)』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1540년으로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편찬/간행 경위] 『연계안』은 1540년 옥계 노진 주도로 만들어진 후 병화(兵禍)로 유실되었다가 박상규(朴尙奎)가 1655년에 다시 편찬하였다. 이후 정재기(鄭在箕)[18..

열부유씨전

傳 書烈婦柳氏傳 孺人姓 柳氏 籍文化 考諱道權 祖諱漢運 曾祖諱震華通德郞 英廟丁亥 孺人生 自幼服習孝友 及長歸于士人蓬山鄭公諱埈 時尊舅已下世 尊姑郭氏在堂 孺人晨起問寢恭執婦道 其在奉養甘旨之節 皆以適志 事君子以禮 睦宗親以道 不幸 甲寅歲 所天爲酷吏李汝節之陰中 無辜致刑以至將死 孺人汲水寒泉祝天代命 時則十月日也 夜半半月初上 人自堀嶺來 心先驚動問 果訃坪也 寃乎慟矣 初終以禮 志欲按劒入官庭復讐 而爲尊堂所沮未果 又欲數次結項下從 而爲尊姑救解伺守 僅保殘命矣 適有慰諭使 自京下來 故切望雪寃之有 便始進粥飮挻身跋涉 自金海熊川 抵于本邑安民驛站 入庭哀訴 庶有矜恤之意 入府經宿後 頓無啓聞之意 而尙有萬一之望 仍隨上京爲計 家有幼嬌 時方三歲 婢季心 抱隨窟峴 孺人食乳誘曰 汝欲從我 則割乳與之 卽拔劒倚乳 雖三歲乳兒 尙知圖事泣而下膝 向季心背上 見者莫不涕淚焉 ..

창원대도호부 탄생 기록 근거

창원지역이 대도호부였다는 것은 창원인의 자부심이라 많은 분들의 글에 인용되어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의 기록이 어디에 실려 있는지 밝혀 둔 곳이 없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조선시대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가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로 되었다는 기록들은 모두가 인용하는 바이나 실재 그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는 잘 기록되어 있지 않아 혹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왕조실록 등을 살폈으나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끝에 “교남지(嶠南誌)”에 실려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근대도지(韓國近代道誌)” 중 교남지권지칠십일(嶠南誌券之七十一)편을 찾아보니 창원부(昌原府)편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창원향교 편액들을 옮겨 적고 해문 하는 과정에서 순조 3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