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책과 기록

대동기문(大東奇聞)

천부인권 2026. 2. 18. 07:10

 

대동기문 전(大東奇聞 全)1993630일 사단법인 학민문화사에서 발간하고 발행인은 홍재곤(洪載坤)이다.

책은 양장본으로 세로쓰기이며 순 한문으로 인쇄하고, 크기는 가로 18.9cm, 세로 26.1cm이며 620쪽이다. 이 책은 202629일 부산데파트 헌책방에서 칠천원에 구입해 소장하게 됐다. 권두에 번천 김영한(樊川 金甯漢)의 서문을 붙이고, 목록을 넣었다.

 

大東奇聞41책인데, 1926년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하고 윤영구(尹寗求)와 이종일(李鍾一)이 교정하여 한양서원(漢陽書院)에서 조선시대의 역대 인물들의 전기·일화를 모아 처음 간행하였다. 이 책에는 태조대 배극렴(裵克廉)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종대 민영환(閔泳煥)에 이르기까지 총 716항이 실려 있다. 이어 부록으로 고려말 수절제신(高麗末守節諸臣)’편에 정몽주(鄭夢周) 이하 98항이 첨가되어 있어, 결국 이 책에는 총 814항목이 실려 있는 셈이다.

 

수록 항들을 각 군왕별로 살펴보면, 1에는 태조 12, 정종 6, 태종 6, 세종 14, 문종 2, 단종 18, 세조 18, 예종 1, 성종 16, 연산군 31, 중종 92항목으로 모두 216항목이 실려 있며, 2에는 인종 4, 명종 61, 선조 127항목으로 모두 192항목, 3에는 광해군 34, 인조 121, 효종 19, 현종 13항목으로 모두 187항목, 4에는 숙종 29, 경종 14, 영조 29, 정조 29, 순조 7, 헌종 6, 철종 2, 고종 5항목으로 모두 121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매 항목마다 배극렴봉국새(裵克廉奉國璽)’ · ‘심덕부총치영궁실건종묘(沈德符摠治營宮室建宗廟)’의 예처럼 자수가 일정하지 않은 한문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는 인명에 사건 요약을 합하여 나타낸 것이다.

 

본문은 한문 원문에 현토(懸吐)를 하였으며, 대부분 출전을 명기하고 있다. 출전이 여럿인 경우도 드물지 않아, 자료 수집에 대한 편자의 성실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출전이 없는 경우는 편자 자신이 기록한 때문이거나 누락된 것인 듯하다.

 

저자가 인용한 문헌은 소대기년(昭代紀年)· 문헌비고· 지봉유설(芝峯類說)· 국조방목· 명신록(名臣錄)· 인물고(人物考)· 상신록(相臣錄)· 매산집(梅山集)· 동평견문록(東平見聞錄)· 동야휘집· 청구야담· 목민심서· 조야집요(朝野輯要)· 명장전등 총 200여 종이다.

 

그 밖에 가장(家狀) · 행장 · 시장(諡狀) · 비명(碑銘) · 묘비명 · 신도비(神道碑) · 현판 · 가승(家乘) · 세보(世譜) 등을 참조한 경우도 적지 않다. 더구나 근대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편자 자신이 직접 듣고 채록한 경우도 많은데, 이러한 경우 운가심기택담(雲稼沈綺澤談)’이나 기본손성석이재영(其本孫醒石李載榮)’처럼 일일이 제보자를 밝히고 있어, 이 책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책머리에 있는 김영한(金寗漢)의 서문에 우리나라 사람의 폐단은 새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가까운 것은 소홀히 하고 먼 것을 중히 여기는 데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역대 인물들에 대해서는 능히 말할 수 있어도, 단군 · 기자 이후의 우리나라 인물들에 대하여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못한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점 모르며, 가까워질수록 점점 소홀히 한다. …… 혹 그 사람은 알더라도 어느 때 사람인 줄 모르고, 그 일은 알아도 누구의 일인 줄 모르고, ()는 알아도 이름은 모르며, 성은 알아도 본관은 모르는 경우가 흔히 있다. …… 송나라 사람은 당연히 송나라의 관을 써야 하고, 노나라 사람은 당연히 노나라의 역사를 읽어야 하듯, 우리나라 사람은 당연히 우리나라의 일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 책의 편찬 의도 및 저술 의의를 엿볼 수 있다.

[출처:한국민조대백과사전-대동기문(大東奇聞)]

 

 

敍大東奇聞

鳥獲能舉于句不能自舉其身何強於物而弱於我耶離朱能察秋毫不

能自睹其睫何明於彼而昏於此耶拘於形者是已楚之巫能爲人降靈

而不能自禳焉奏之醫能爲人回生而不能自療焉何神於人而不神於

己耶蔽於私者是己若居魯而不讀春秋惟乘檮杌是講居宋而不冠章

甫惟鷸鵕是戴果形之拘歟私之蔽歟徒見其癡獃狂惑已耳東人之患

在好新而尚奇忽近而急遠故周秦漢唐婦孺亦能言之而檀箕以降雖

老宿自名者或不能細述其事愈降而愈昧愈近而愈忽義利之眯焉而

有認蹠爲舜者美惡之混焉而有喚銀作鐵者是非之亂焉而有指朱謂

紫者巧曆不能數矣又或知其人而不知出於何世知其事而不知作於

何人知號而不知名知姓而不知貫者比比也甚至有問其父若祖之言

行噤其喙而左右視及論域外事雖層溟萬里百重譯風馬牛不相及之

地瞭然指諸掌津津纚纚口無餘涎於是乎吾之感滋甚吾友衿川子生

於大東老於大東史嘗曰勝國以前述已備焉肇 藝祖止 洪陵聞奇

事輒錄爲四巨編一冊籤曰大東奇聞以余爲大東人俾書其端大抵以

奇爲書也故有齊諧焉有滑稽焉有野人之語焉是史之稗也烏可曰菽

粟乎又有名碩之功業焉有忠孝之卓絕焉有道義文學之崇閎煒燁焉

是豈可一例稗之者耶其間薰蕕襍陳芳臭不同者讀者自當辨之不須

費唇吻若有好新而忽近者從傍呀然笑曰是陳腐耳無足奇也子必曰

宋人當冠宋冠魯人嘗讀魯史大東之人當識大東之事

乙丑竹醉節 樊川金甯漢序

 

 

대동기문 서

오확(전국시대 진나라의 역사)은 무게 천근을 드는 장사였지만 자기의 몸은 들지 못하였으니 어찌하여 물건을 드는데 강하고 자신을 드는 데는 약하였던가.

이주(離朱)의 시력은 가을 털 끝은 살필 수 있어도 자신의 눈썹은 볼 수 없었으니 어찌하여 털 끝을 보는 데는 밝고 눈썹을 보는 데는 어두웠던가. 이는 형체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초나라 무당은 남을 위하는 데는 혼령도 불러내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재앙도 물리칠 수 없었고, 진나라 의원은 남의 목숨은 살려냈지만 자신의 병은 낫게 하지 못하였다. 어찌하여 남에겐 신비한 효험을 보이면서 자신에겐 보이지 못했을까. 이는 사심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노나라에 살면서 "춘추"(노나라의 역사서)는 읽지 않고 ""(진나라의 역사서)을 읽는다거나 송나라에 살면서 장보(송나라 의관)를 착용하지 않고 깃 털모자를 쓴다면 이는 형체에 구애된 때문일까, 아니면 사심에 가려졌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어리석고 미혹되기 짝이 없음을 느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을까? 새것을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며 우리 것은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배우기에 급급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 , , 당 등 중국 역사에 대해서는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거침없이 설명하면서 단군, 기자 등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노숙한 선비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상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세대를 내려올수록 더욱 어렵고 우리와 가까운 일일수록 더욱 소홀하다.

의로움과 이로움을 가리지 못하여 도척을 순임금으로 잘못 아는가 하면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혼동하여 은을 철이라 우기며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며 주황색을 자주색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 아니 이러한 자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사람의 이름은 알면서 그 사람의 산 시대는 알지 못하는가 하면, 그 사건은 알면서 그 사건이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며, 성은 알면서 본관을 알지 못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심한 경우에는 자기 조상에 대한 역사는 캄캄하여 누가 물으면 아예 입도 벌리지 못하고 딴전만 피다가 외국 역사에 대해 말하게 되면 산바람이 나서 바다 건너 멀고먼 불모지까지도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말하듯 소상하게 설명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병폐인가? 우리들의 의문은 여기서 더욱 심하게 된다.

나의 벗 금천자는 이 땅 대동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늙은 사람이다. 언젠가 그는 내게 말하기를, 고려 이전의 일은 이미 기록이 정비되어 있으니 두어두고, 조선 태조부터 고종까지 사이에 일어난 기괴한 일들을 기록하여 41책으로 만들어 이름을 "대동기문"으로 했다고 하였다. 또 나도 이 땅 사람이란 이유로 그는 나에게 서문을 쓰도록 하였다.

이 책은 기이한 일을 실은 책이므로 괴이한 이야기도 있고 익살맞은 사실도 실렸으며 야인의 사적도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역사 속의 패사라면 말이 되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적인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이 속엔 이름난 공과 큰 업적에 관한 이야기며 뛰어난 충신, 효자 이야기며 숭고한 도학과 빛나는 문학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어찌 단순한 한낱 패사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속엔 아름다운 이야기와 추악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고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가 섞여 있으니 그 가치 판단은 마땅히 독자가 해야 한다.

만약 새것을 좋아하고 우리 것을 소홀히 여기는 자가 곁에 있다가 하하 웃으면서 이 책이 진부하면 진부했지 기이할 게 무엇이냐고 비웃는다면, 아마 자네는 틀림없이 송나라 사람은 송나라 관을 써야 되고 노나라 사람은 노나라 역사를 읽어야 하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노나라 역사를 읽어야 하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할 걸세.

 

을축년(1925) 죽취일(음력 513, 대를 심는 날)

번천 김영한(樊川 金甯漢)이 서문을 쓰다.

 

 

太祖朝

裵克廉奉國璽

裵克廉 星州人이니 高麗恭愍朝 文科하야 累官至門下左侍中하고 以廉謹으로 하니 恭讓王壬申六月十六日 克廉 與趙浚鄭道傳等大小臣僚及閑良耆舊 奉國璽寶하고 詣太祖邸하야 合辭勸進하니 太祖遂登寶位하시다.

太祖妃神懿王后淸州韓氏誕六男하시니 定宗 居第二하시고 太宗 居第五 同妃神德王后谷山康氏誕二男五女하시니 芳蕃 序居七하고 芳碩 序居八이라 太祖嘗引裵克廉趙浚于內殿하사 議立世子하신 克廉等 曰時平立嫡이요 世亂先功이니이다 神德后聞之하시고 哭聲 聞外어늘 遂罷出하다 他日 又召克廉하시니 時議無復以功以嫡爲言者 克廉等 退而議曰康氏必欲立己出일서 芳蕃 狂悖하고 其季稍可라하야 遂請封芳碩爲世子하다 本朝左侍中으로 策開國功臣一等하고 特進輔國領相 星山伯  貞節이려라

 

 

배극렴(裵克廉) 배극렴이 국새를 받들다

배극렴은 성주(星州)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삼가는 태도로 칭송이 자자했다.

공양왕 임신년(1392) 6 16, 배극렴이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 대소 신료 및 한량과 원로들과 함께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이성계)의 저택으로 찾아갔다. 그들은 입을 모아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고, 태조는 마침내 보위에 올랐다.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 청주 한씨는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정종(이방과)이 둘째이고 태종(이방원)이 다섯째였다. 또 다른 비인 신덕왕후 곡산 강씨는 두 아들과 다섯 딸을 낳았는데, (아들 중) 방번은 일곱째이고 방석은 여덟째였다.

태조가 일찍이 배극렴과 조준을 내전으로 불러 세자를 세우는 일을 논의했다. 배극렴 등이 말하기를,

"평화로운 시대에는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자()를 우선해야 합니다."

하니, 이 소리를 들은 신덕왕후가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밖까지 들렸다. 이에 논의를 중단하고 물러나왔다.

훗날 다시 배극렴을 부르니, 당시 의론은 다시 '공로' '적자'를 따지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배극렴 등이 물러나와 의논하며 말하기를,

"강씨(신덕왕후)가 반드시 자기 소생을 세우고자 하는데, 방번은 미치고 패악하며 그 막내(방석)가 조금 나은 듯하다."

하여, 마침내 방석을 봉하여 세자로 삼기를 청했다.

조선(本朝)에서 좌시중으로서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특별히 보국숭록대부 영의정(領相), 성산백(星山伯)에 올랐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