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200

창원의 정신과 역사를 간직한 곡목마을

창원시 동읍 화양리 곡목마을은 30번 지방도로를 따라 동읍 다호리에서 화양리로 1km여를 가다 보면 길 좌측에 비석군이 보이는 마을이다. 주남저수지 일대가 그러하듯이 청동기시대에서 가야시대의 유물들이 마을 인근에 산재해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곳 곡목마을이 중요한 것은 창원 유학의 정신적 지주라 할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과 그의 제자 유당(攸堂) 김종하(金鍾河), 칠원의 중원(中園) 배문회(裵文會), 대전의 육천재(育泉齋) 안붕언(安朋彦)이 수학하였던 곳이다. 마을입구 동읍 화양리 45-4 양쪽에 세워져 있는 비석군들을 살펴보면 조선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충효비 4기와 화목김씨세거지지(花木金氏世居之地)이다. 가첨석과 비신, 비대를 다 갖춘 화목김씨주종사세기행비(花木金氏冑宗四世紀行..

취원당 조광익선생 효자정려각(문화재자료 제358호)

밀양시 초동면주민센터가 있는 오방리(五方里)를 벗어나려는 지점 도로좌측 아래에 자리한 취원당 조광익선생 효자정려각(聚遠堂 曺光益先生 孝子旌閭閣)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스쳐 지나기 쉬운 곳이었다. 정려각의 내부는 비석이나 다른 시설물은 없었고 “효자조봉대부형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조광익 려”라는 글자가 새겨진 편액이 화려한 매화꽃 아래에 걸려 있다. 마주보이는 정면에는 청년이 얼음 속에서 잉어를 잡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우측 벽면의 위쪽은 기러기 두 마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그렸고, 아래에는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좌측에는 한가로이 거니는 노인이 그려져 있다. 려각 내부의 그림들은 아마 조광익선생(曺光益先生)의 일생을 그림으로 남겨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창원대학 내에 있는 유적 물

창원대학 내에 있는 유적 물들을 찾아보았다. 추모각(追慕閣)은 원래 상촌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약간의 위치를 조정했을 뿐 그곳에 있는 것이라 문화재에 가까운 것이다. 그 외 장명보비(張明甫碑)나 반계동지석묘(盤溪洞支石墓) 등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가져온 것으로 품격이 떨어진다. 문화재란 “그곳에 있을 때에 문화재인 것이지 옮겨지면 골동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이전한 것은 후세를 위해서 중요한 일을 한 것으로 없어서 보지 못하는 것보다 보존한 공은 칭찬할만하다. 추모각를 가기직전에 “내 고향 상촌 땅”이라는 표지석이 서있고, 뒷면에는 이런 싯구가 쓰여 있다. 상촌연가(上村戀歌) 수리덤, 굿밭등, 붉은등, 누운등은 상촌의 근간이요 국논, 묵답, 못밑, 큰자리는 우리의 곳간이며 삼밭골,..

창원천의 심탄각석

창원천변(퇴촌산 138-1번지) 하천부지에 언제 누가 왜 이런 글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자연암석에 위 쪽 글귀는 깨어져 없고 아래쪽에 【心灘】이라는 의미심장한 글이 남아있다. 心(마음심) 灘(여울탄) = 마음의 여울 깨어진 글자가 한글자라면 洗心灘(세심탄=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여울)은 아닐까? 하고 상상을 해본다. 이곳이 하천을 직선으로 만들기 전 옛날 구불구불 흘러가던 물길의 가장자리로 빨래터 또는 우물이 있었는지 아니면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 숙제 하나가 생겼다. 심탄각석의 출처를 1962년 김종화가 쓴 창원군지에서 찾았다. 창원군지 하권 비지碑誌 p150에 기록된 안교형묘갈명의 기록에 "마을 앞 자연석에 세심탄洗心灘이란 이름의 글자를 새겼다"고 나온다. 安教炯墓碣銘 金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