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 1263

구산면 심리 진주정씨 영모재 永慕齋

구산면 심리 600-1(심리2길 11-14)는 진주정씨晉州鄭氏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위치한 곳이다. 선조 구은공龜隱公 정연달鄭延達을 모시고 향사하는 영모재永慕齋는 구글 지도에는 「위도 35°04'08.4"N 경도 128°36'24.7"E」를 표시한다. 영모재 주련(永慕齋 柱聯) [전문] 龜山深里自生皋 구산(龜山)의 심리(深里)에 절로 언덕이 생겼으니 夏海雄波未興淸 큰 바다의 거대한 파도 넘실거리나 덮쳐오지 않네. 戒子遠慮庭訓德 자손 경계한 깊은 염려는 집안의 가르침 덕분이니 敢忘不敬慕先靈 감히 잊고서 선조의 영령을 경모하지 않겠는가. 精禋苗裔俗於香 인정 있고 예의바른 후손들은 풍속이 향기롭고 華閥儒風世蔭氈 화려한 벌열 유교 풍속은 선대 음덕의 유물일세. *未興淸 : 미상. 파도가 넘실거리며 덮쳐오지 않..

진전면 일암리 초계변씨 성구사 誠久祠 영역

2015.5.6. 일암리 초계변씨 성구사誠久祠 영역의 건물들 진전면 일암리 394-2(일암1길 151)는 4·3삼진의거 발상지로 성구사誠久祠 영역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245호』로 지정이 된 초계변씨草溪卞氏 3현賢을 모신 사당祠堂인 성구사誠久祠를 비롯하여 유학을 가르쳤던 도산서당道山書堂과 동재東齋인 일신재日新齋, 서재西齋인 존양재存養齋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구글 지도가 「위도 35°07'15.5"N 경도 128°22'42.4"E」를 가리킨다. 문도산問道山 기슭 아래에 위치한 일암리日岩里 성구사誠久祠 영역은 우리지역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곳으로 초계변씨草溪卞氏 문중門中의 3현三賢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성구사誠久祠는 고려말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낸 변빈卞贇과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순국한 병조판서..

진동면 동전리 밀양박씨 동강재 東岡齋

2019.12.21. 진동면 동전동 밀양박씨 동강재東岡齋 대문 동강재 사칙문思則門 편액 2019.12.21. 진동면 동전동 밀양박씨 동강재東岡齋 동강재 주련 柱聯[해문-文山] 國峯下東川上 국봉(國峯) 아래 동천(東川)의 상류에 築一堂近斧堂 당 한 채를 조상의 묘 근처에 지었으니 承先德啓後方 선조의 덕을 이어 미래를 도모하네. 敬恭昕夕來梓 삼가 존경하여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찾으니 悽怵春秋露霜 슬픔과 가여움이 봄가을의 이슬과 서리 같구나. 東岡齋記 方丈山東走三百里作匡廬 卽龜山之鎭也 山之一脈東迤 北析蜿蜒磅遇海 而止削立蒼壁森列屛帳 其下有一東田 泉石淸冽而甘土品肥沃 而幽必爲高遯自適之士 盤桓棲息之所也 通政大夫密陽朴公 自淸州聿胥于 此子姓蕃衍門蘭赫赫語先世之德 卽文武宰宦道學文章 世濟其美 曰恭孝曰忠靖公也 及後簪纓雖不逮 古彬..

성주사 창건기로 본 믿기 어려운 역사 이야기

2020.6.1. 장복산 능선에서 본 성주사 곰절 이 사진을 찍은 곳은 웅산에서 안민고개로 내려오는 능선으로 높이는 해발 452m, 위도 35°09'58.5"N 경도 128°42'48"E의 위치이다. 아래의 2012년 사진과 비교해보면 숨은그림찾기처럼 변해가는 성주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주사聖住寺의 또 다른 이름이 웅신사熊神寺이다. ‘성인이 머무르는 사찰’이란 의미의 성주사聖住寺와 ‘곰의 신령이 있는 절집’이란 의미의 웅신사熊神寺를 동시에 사용하는 절집이다. 그래서 내가 어릴 때부터 ‘성주사 곰절’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성주사聖住寺의 창건설화는 2가지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 하나가 가야시대 남방불교를 전파한 장유화상長遊和尙 창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흥덕왕 때의 무염국사無染國師 창건설이다. 첫째..

성주사 곰절의 금석문-남무아미타불마애비

『불모산성주사佛母山聖住寺』 표지석에서 옛길을 따라 걸어서 가다 보면 길 좌측에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새긴 마애비磨崖碑를 만난다.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람들의 이름과 화주化主 강등암姜藤巖의 업적을 새겨 두었다. ③의 해설을 붙이자면 비신碑身과 비개碑蓋는 제대로 갖추어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었으며, 『광서임진추光緖壬辰秋』라는 내용이 각자 되어 있어 고종 29년(1892) 가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 높이는 204cm, 비신 높이 133cm, 너비 105cm이다. ① 金鍾瑨 号杞泉 김종진 호기천-김종진은 기천이라 불렀다. ② 化主藤巖璨勛 화주등암찬훈 襢越同參僉貟 단월동참첨원 【주석】 화주는 조실祖室인 등암藤巖으로 이름이 찬훈璨勛이며 성은 강씨姜氏이다. 보시(단월襢越..

성주사 동종과 그에 새긴 명문

2020.5.26. 성주사 동종각 모습 성주사聖住寺 동종銅鐘은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7호』로 지정된 지방문화재이다. 동종에 새긴 명문에는 「건륭사십팔년乾隆四十八年 계묘癸卯」라 기록하고 있어 서기 1783년(정조 8년) 계묘년癸卯年에 처음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문의 끝에 『세존응화이천구백사십육년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六年 무오구월일戊午九月日』이라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세존응화 2946년 무오년 9월일」 즉 서기西紀 1919년 9월에 다시 『성주사 동종』을 주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총 높이는 111㎝, 종구鐘口 지름은 84㎝, 무게는 600근이며, 용뉴龍紐에 음통音桶은 없고 쌍용雙龍으로 고리를 장식했다. 종 몸체 가운데에는 4개의 유곽이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성주사 곰절의 경주이씨 마애석

2020.5.26. 성주사의 경주이씨 선산 표지석 성주사의 절집 쪽에 있는 개울의 큰 바위에는 경주이씨의 선산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의 해발 높이는 139m이고, 구글지도는 위치를 「위도 35°10'33.4"N 경도 128°43'03.7"E」를 가리킨다. 성주사 동종이 있는 곳에서 성주사탬플스테이를 하는 곳으로 내려서 좌측의 계곡 맞은 편을 보면 『경주이씨마애석慶州李氏磨崖石』이라 이름하는 마애석이 보인다. 철책을 어렵게 넘어서 그 내용을 보니 경주이씨 선산의 표지석으로 바위의 위쪽에 조부 방화芳華, 아버지 성률星律의 묘지가 있는 위치를 걸음의 수로 기록해 두었다. 이 마애석에 기록을 남긴 사람은 첫째 손자인 인식仁植과 둘째 손자인 인곤仁坤이며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1890년에 이 선산 표시석인..

성주사의 금석문-어수각 주변의 마애비군

어린시절 성주사 곰절은 내가 노는 놀이터처럼 다녔던 곳이다. 초등학교 때 봄·가을 모든 소풍은 오로지 성주사 곰절로 12번을 갔고 중학교 때에도 5번 소풍을 간 장소이다. 당시의 모습과 지금의 절 모습은 천지개벽天地開闢을 했다고 할 정도로 달라졌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당시에도 절 입구의 커다란 돌들에는 금석문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한자漢字인 관계로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아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읽어 보는 수준이다. ‘어수각御水閣’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금석문은 지금의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출입구의 변경으로 지금의 위치에 옮겨 두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바위에 새긴 글자들은 예전 그대로이다. 성주사 곰절 주위에는 이러한 금석문이 조금 더 남아 있..

당항포 해전 가능케 한 창원지역의 망대 발견

진전면 창포리 산8번지에 “봉수대烽燧臺 같은 흔적이 있다.”고 아는 분이 제보하여 창포곶串에 있는 그 장소로 갔다. 이곳은 개인 사유지라 주인에게 연락하고 방문을 하니 봉수대의 흔적이 있다는 곳 바로 아래까지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 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35m, GPS고도계는 74m를 표시하고 위도 35°04'37"N 경도 128°28'27"E를 표시한다. 창포곶串은 시락산時樂山이 진해만鎭海灣을 만나 고성군 당항포唐項浦로 갈 수 있는 입구에 요새要塞 같은 작은 만灣을 형성한 곶串부리 지역이다. 이 작은 만灣을 창포만昌浦灣이라 이름하고 지금부터 창포곶에서 발견한 창포망대昌浦望臺 이야기를 한다. 창포곶昌浦串은 진해만의 바다가 당항포로 깊숙이 이어진다는 것을 속일 만큼 고성군 외산리 쪽으로 휘어져..

진전면 평암리 미천 창녕조씨 서암정 棲巖亭

진전면 평암리 1034(미천2길 3)에는 애국지사 서암棲巖 조선생曺先生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세운 서암정棲巖亭이 위치한다. 이곳을 구글지도는 「위도 35°09'14.4"N 경도 128°24'00.4"E」를 가리킨다. 창녕조씨昌寧曺氏인 조계승(曺啓承 1880.1.,14)선생은 호號가 서암棲巖이며 옛 함안군 여항면 평암리 미천마을에서 태어나셨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고 민족 해방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오후 2시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