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71

산청향교 현판과 기문

산청향교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24호 산청군 산청읍 지리 369-1 산청향교(山淸鄕校)는 1440년(세종 22)에 세워진 이래 임진·병자 두 전란을 겪으면서 불탄 것을 1755년(영조 31)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이 지역의 문화 발상지이며, 인재양성의 기관으로 자리하여 왔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5칸의 동재(東齋), 7칸의 명륜당, 4칸의 욕기루(浴沂樓), 내삼문(內三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유물로는 와준(窩樽) 1개, 주배(酒杯) 3개, 제구(祭具) 일체, 변두(籩豆) 일체, 유복(儒服), 예구(禮具) 등이 보관되어 있다. 전교(典校) 1명과 6부 장의(掌議..

산청 단성향교 현판과 기문

2019.7.11산청 단성향교 홍살문의 풍경 2019.7.11산청 단성향교 외삼문 관선문(觀善門) 단성향교 관선문(觀善門) 편액 단성향교 명륜당 앞면 모습 산청 단성향교(山淸 丹城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8호 산청군 단성면 교동길 13-15 산청군에는 단성향교와 산청향교가 있다. 옛 현의 위치에 따라 지어진 단성향교(丹城鄕校)는 고려 인종(仁宗) 5년(1127)에 금잔방(金盞坊) 금강누리구인동(今江樓里九印洞)에 창건했다. 이후 현재의 위치인 교동에 이건하기까지 사실기록으로 운창 이시분(雲牕 李時馩)이 쓴 운창지(雲牕誌)에 의하면 “향교는 금잔방(金盞坊)에 있고 현청은 강루평(江樓坪)에 있다. 불미한 사건으로 인하여 현청은 내산하(來山下)로 향교는 서산록(西山麓)으로 이건 하였다.”고한 기록이 있다...

산청향교 배움의 열기 후끈

유교경전 강학을 하는 산청향교 김신수 전교 7월 11일(목요일) 10시경부터 산청향교(김신수 전교) 명륜당에는 유교경전을 배우기 위한 산청지역 유림들이 모였다. 산청군은 18,955세대, 남녀 합하여 35,713명이 살고 있는 초고령화 지역인데 유교경전을 배우려는 유림이 35명이나 명륜당을 찾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경전강좌는 지난 4일에 개강식을 가진 후 오늘 첫 강학이 시작된 날로서 매주 목요일 10시에 강학을 시작 하여 12시까지 이어진다. 산청향교에서 경전을 강학하는 분으로 松齋 김신수, 槐亭 임명규, 隱山 송남섭 선생을 강사에 위촉했으며 1시간씩 각자가 맡은 강좌를 이끌어 간다. 이번 유교경전 강학은 산청향교를 출입하는 유림들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개혁의 일환으로 시작했지만..

유교식 제상 차림표

2018.9.12 창원향교 석전대제 모습 우리나라 유학은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 행하는 석전제례(釋奠祭禮)에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석전(釋奠)은 “전통 사회에서 산천(山川)·묘사(廟社)에 올리던 제사, 또는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를 추모하기 위하여 올리던 의식”이다. 석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주례』·『예기』 등 유교 경전에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묘사에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산천·묘사에는 이밖에도 여러 제향(祭享)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는 오직 석전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석(釋)은 ‘놓다(舍也)’·‘두다(置也)’의 뜻이고, 전(奠)은 ‘그..

거창향교 주련과 편액 해문

2018.12.11. 거창향교 춘풍루와 또 다른 외삼문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을 보고 나오는 길에 싸락눈이 점점 굵은 눈으로 바뀔 때 거창향교 입구에 도달했다. 거창향교는 외삼문이 2개인 것이 특징적인 향교이다. 원래 외삼문 역할을 하던 춘풍루(春風樓)라는 현판이 있는 문루는 명륜당의 출입문이고 대성전 앞에 있는 외삼문에는 이름이 없다. 내부에 들어가면 어디로던 갈 수는 있지만 외형적으로는 명륜당과 대성전이 분리된 모습을 하고 있다. 거창향교 내력 거창향교는 1415년(태종 15)에 대성전을 지었고 1572년 개수했다. 그 뒤 대성전은 1606년과 1810년에 중수했으며 동제는 1840년에 중수했다. 1574년에 명륜당을 지어 지방교육기관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창원 회원서원 향례 봉행

좌로부터 원장 공수일, 초헌관 구영주, 아헌관 김근희, 종헌관 박영덕, 집례 정길윤, 축 정수태 등 향례 집사 소개하고 있다. 초헌관이 헌작을 하고 있다. 이번 10월 22일 창원 회원서원(昌原 檜原書院:원장 공수일)에서 40여명의 창원 지역 유림들이 모여 향례를 봉행 했다. 공수일 원장은 인사말에서 “오늘 본 서원의 향례가 차질 없이 진행되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정성을 모아 주기 바란다.”며 향례를 엄숙히 봉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날 집사들에는 초헌관 유학 구영주, 아헌관 유학 김근희, 종헌관 유학 박영덕, 집례 유학 정길윤, 축 유학 정수태, 알자 유학 정황근, 찬장 유학 배종식, 봉향 유학 조형래, 봉로 유학 노승영, 사준 유학 이필위, 사촉 유학 김기준, 안원준, 봉작 유학..

창원향교 - 창원시장 취임 고유례 봉행

2018.9.8 허성무 창원시장 창원향교에서 고유례 봉행 창원시 허성무시장이 9월 8일 14시 30분에 창원향교(전교 김혁래)에서 이번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18.06.13.)에 창원시장으로 당선 된 후 바쁜 일정으로 미루어 오던 고유례를 봉행했다. 이날 창원향교 장의 및 여성회원 40여명이 참석하고 허성무 창원시장의 의전을 위해 황진용 의창구청장 및 담당 공무원들이 참석했다. 허성무시장의 고유례 봉행을 위해 창원향교 김혁래 전교 및 수석장의들이 창원시 담당관과 협치를 하였고 이 과정에서 항원향교의 위상과 미래의 발전방향을 논의하는 시간도 가졌다. 고유례(告由禮)란 ‘국가나 개인이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선현들에게 그 이야기를 알리는 의식으로 전통시대부터 그 고을의 수령(지도자)은 향교 대성전에 ..

창원향교 동·서재에 남긴 애틋한 옛 사연

창원향교는 성현의 뜻에 따라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돈독히 하는 제례(祭禮)와 교육(敎育)의 공간이다. 크게 3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봉행하는 제향 기능을 주관하는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廡)가 있고, 유생에게 유학(儒學)을 교육하는 교학 기능의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東·西齋)의 영역이 있으며, 지방의 문화 향상 등을 도모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사회 교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풍화루(風化樓)의 영역이 있다.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향교는 엄밀히 말해 불교나 기독교와 다른 내세관(來世觀)이 배제 된 교육과 통치의 수단이 함께하는 형태의 종교이다. 따라서 유생들은 성현의 뜻을 쫓아 성경을 배우고 자신을 수련하여 나라를 발전시키는 주역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 했다. 향교에..

창원향교 풍화루기와 풍화루 영역

2016.11.7 창원향교 홍살문과 풍화루가 있는 풍경 창원향교가 청룡산(靑龍山) 아래에서 이곳 태을산(太乙山) 아래로 이건 한 후 가장 나중에 세운 건물이 출입문인 풍화루 이다. 풍화루를 창건한 임익창(任益昌) 부사는 경진년(庚辰年 : 1760) 2월에 부임하여 임오년(壬午年 : 1762) 7월에 교체 되었다. 손사익(孫思翼)선생이 소양(癸未年 : 1763) 3월에 쓴 풍화루기(風化樓記)는 기록만 있고 현판은 없다. 풍화루 앞에는 “부사임후익창풍화루창건비(府使任侯益昌風化樓剏建碑)”가 세워져 있으며 비문은 부사가 떠난 3년 후인 1765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7.2.11. 창원향교 풍화루 風化樓記 於休遠哉 三代敎法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 無適非學而蓋所以 風化天下 試考..

창원향교 중수기와 명륜당 중수기 및 상량문 등

2014.10.8. 창원향교 명륜당 풍경-花階가 잘못되어 있을 때 모습 창원향교는 크게 제례 영역인 대성전과 동·서무, 교육 영역인 명륜당과 동·서재를 비롯하여 출입문인 홍살문과 풍화루가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이 된 곳은 제례 영역인 대성전 1동이며 보호구역은 5,025m² 중 지정구역은 221.4m²(약 67평)이다. 그러다 보니 명륜당과 풍화루가 문화재가 아닌 보호 건물로 남아 있어 품격이 떨어지는 모양새이다. 명륜당과 풍화루 역시 전통시대의 맥을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인데 홀대를 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따라서 옛 기문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문화재 지정을 하여 품격에 걸맞은 위치를 찾아 줘야할 것이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