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201

웅천초등학교 설립자 주기효 선생 공적 비갈

“웅천사립개통학교” 설립자 朱基孝先生(주기효 선생)은 1867년 10월 6일에 태어나 1941년 2월 8일(74세)까지 사셨다. 자는 우원, 호는 석천으로 서당에서 수학하였으며 1902년에 웅천군의 판임주사로 서임되었다.웅천사립개통학교는 웅천국민학교로 사용되다가 國民(국민)이라는 용어가 일제강점기에 사용했던 ‘皇國臣民(황국신민)’의 줄임말임을 알고 1996년 3월 1일 웅천초등학교로 개칭했다.‘국민학교’란 명칭은 대한민국 광복 50주년을 맞아 1941년 일제강점기 때 일왕칙령 제148호 ‘국민학교령’에 의해 사용했던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1995년 8월 11일 ‘초등학교’로 변경했다. 이처럼 명칭을 변경 한 것은 백년대계라는 나라의 교육이 일제의 식민교육으로부터 깊게 박혀있는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진해구 북부동 주병석, 주한혁 정려각과 절부 김응범의 처 주씨 비

2016.12.05. 웅천 북부동 주병석, 주한혁 정려각과 절부 김응범의 처 주씨 비가 있는 풍경 진해구 북부동 592번지는 중국 新安(신안)이 본관인 朱氏(주씨) 3명의 효열각 및 절부 비가 세워져있는 곳이다. 지금은 ‘웅천로’라 부르지만 옛 국도2호 도로가 지나는 길가에 위치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도로에서 바라보면 우측에 ‘孝子朱秉奭旌閭閣(효자 주병석 정려각)’이 있고 중앙에 ‘節婦金應凡妻朱氏碑(절부 김응범 처 주씨 비)’가 위치하며, 그 좌측에는 ‘孝子朱漢奕旌閭閣(효자 주한혁 정려각)’이 있다. 2016.12.05. 웅천 북부동 주병석, 주한혁 정려각과 절부 김응범의 처 주씨 비의 뒤쪽에서 본 풍경 □ 孝子朱秉奭之閭(효자 주병석지려) 주병석 효열각은 광무 2년(1898)에 제작되었다. 여각 내부..

창원시 대장동 주정원 효자비

대장동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진 성흥사가 있고, 대장동 계곡이 있어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로도 유명한 곳이다. 요즘은 진해구 앞 바다의 매립과 개발로 인해 조용하던 소사동과 대장동 일대가 도로 공사로 인해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또한 옛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도로로 인해 마을 자체가 보이지도 않는다. ‘호구총수’에는 ‘大正洞里(대정동리)’로 나오나 1899년 웅천군 지도에는 ‘大壯洞(대장동)’로 기록 되어 있다. ‘大壯洞 朱鋌源 孝子碑(대장동 주정원 효자비)’는 대장동으로 진입하는 대장교에서 약 330m 지점인 진해구 대장동 22-17에 있는데 대장동 입구에 위치하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보게 된다. ‘대장동 주정원 효자비’가 위치한 곳은 마을 입구 도로변 들판에 있어 비를 보호하기 위..

창원시 용원동 유주각과 부인당비

용원동 산 197번지에 위치한 維舟碑閣(유주비각)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이 되었다. 유주비각은 융희 2년(1908년) 11월에 김해허씨 문중에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건설했다. 비각 안의 維舟碑(유주비)는 높이 175cm, 폭 76.5cm, 두께 35cm이다. 정면에는 ‘大駕洛國太祖王妃普州太后許氏維舟之地(대가락국태조왕비보주태후허씨유주지지)’라 새겼다. 유주비각을 이곳에 세운 이유는 가락국 수로왕이 도읍을 정한지 7년만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할 것을 말하자 “내가 여기에 온 것 같이 왕비 또한 하늘이 주실 것”이라며 진해구 용원동 바닷가에 나가 기다릴 것을 명하고 기다리니 어느 날 서남쪽 해상에서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배한척이 다가왔다. 그 배는 阿踰陀國(아유타국)의 공주..

창원시 구암동 정봉락 처 은진송씨지려

창원시 구암동 13-3번지에는 3층 건물이 있고 바로 옆에 ㄷ자의 벽돌로 담을 쌓고 입구엔 철문을 달아 둔 비각이 도심 속에 있다. 맞은편에는 구암1동작은도서관이 위치해 있어 비교적 찾기는 쉽다.    비는 ㄷ자의 담장을 하고 전면에 철재로 문을 달았으며,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고 좌우에 편석을 세운 후 그 위에 지붕돌을 얻어 여각의 형태를 만들었다. 지붕돌 아래에는 가로로 석편액을 넣고 ‘鄭鳳洛妻恩津宋氏之閭(정봉락처은진송씨지려)’라 적고, 그 옆에 光武九年九月三十一日 命旌(광무구년구월삼십일일 명정)이라 새겨 1905년 9월 31일에 세웠음을 알게 했다. 비신은 碑座圓首(비좌원수)형으로 ‘鄭烈婦宋氏旌閭碑(정열부송씨정려비)’로 시작하는 비문을 적었다. 비신의 뒷면에는 安東 權龍鉉(안동 권용현)이 撰(찬)하고..

창원시 외동 절강 팽씨 부자 포효비

창원시 성산구 외동 626-4번지에 위치한 ‘外洞 浙江彭氏父子褒孝碑(외동 절강팽씨부자포효비)’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彭友德(팽우덕) 장군과 그의 아들 彭信吉(팽신길)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이 비는 전면에 ‘浙江彭氏父子褒孝碑(절강팽씨부자포효비)’라 새겼고, 비의 크기는 기단의 높이가 총 95cm, 이수에서 비신까지 229cm, 비신 높이 157cm, 너비 62cm, 높이 28cm이다. 비의 측면에는 辛亥十月小雪日(신해십월소설일)이라 기록하고 있어 음력 1971년 10월 22일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漢山 安朋彦(한산 안붕언)이 비문을 짓고, 盆城 金成學(분성 김성학)이 글씨를 썼으며 후손 應柱(응주)가 세웠다고 적었다.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군 50여 장군 중에 禦倭摠兵 ..

내서읍 상곡리 이원순이 통곡한 서대

내서읍 상곡리 14-5번지에는 아들 당산나무라 불리는 상곡리 西臺(서대) 느티나무가 있는데 나이 100년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210cm, 높이는 13m 정도이다. 이 당산나무 아래에는 대한제국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함께한 창원지역 유림의 통곡을 담은 西臺(서대)라 적은 비석이 있어 지역의 역사를 아는 분들이 귀중히 여기는 곳이다. 요즘 새로 세운 서대의 해석비문에는 아래처럼 적어 두었다. 『내서면 상곡리 읍산재 뒤에 있는 이 서대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원순이 1918년 광무황제 승하 시에 北向望哭(북향망곡)하던 곳이다. 이원순 공의 자는 도여(道汝), 호는 소여(小廬)라 하고 조선말 철종 14년 1863년 11월 10일 상곡리 출생으로 어릴 때부터 재주가 능하야 晝耕夜讀(주경야독)하며 부모 섬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