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200

진동면 진해향교(마산향교) 묵암처사 이규신 비

현 마산향교라 이름 하는 진해향교는 1414년(태종 14) 진해현이 설치되면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때 재건하였으나 1920년 일제의 강압으로 철폐되어 창원향교에 통합되었다, 다시 1993년에 창원군향교로 재건되었다가 1995년 마산향교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전통을 따르자면 진해향교라 칭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우리지역의 지명이나 역사가 뒤틀린 것은 일제치하의 영향이 크며 특히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일제의 교육을 받고 의심 없이 사용하는 교육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의 얼을 세우려면 우리가 가진 고유의 명칭을 사용하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들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진동면 교동리 549-1번지 진해향교 앞에는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景默契(경묵계..

진북면 인곡리 아랫담 여남처사 장순후 기적비

<2016.11.01. 인곡리 아랫담 여남 장순후 기적비> 의림로변에 위치한 ‘艅南張醇厚紀蹟碑(여남 장순후 기적비)’는 인곡리 느티나무 보호수에서 의림사 방향으로 65m 떨어진 인곡리 아랫담마을 입구인 진북면 인곡리 796번지에 세워져 있다. 艅南 張醇厚(여남 장순후)의 행적을 기리는 이..

진북면 인곡리 정곡마을 거석 풍영대

인곡리에서 가장 알려진 곳이 있다면 의림사 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의림사 방향의 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이 있으나, 같은 인곡리 이지만 정곡마을은 특별히 볼일이 없으면 찾을 일이 없다. 그러다보니 仁谷里 風詠坮(인곡리 풍영대)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인곡리 정곡마을 입구에 있는 노거수 느티나무를 보고 들판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커다란 바위가 들판에 서 있어 고인돌로 착각할 정도였다. 차량을 길가에 주차하고 거석이 놓인 자리로 접근해보니 어떻게 이 바위가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인근의 암석들과 같은 종류라는 것은 알았다. 풍영대는 계단식 논으로 되어 있는 곳의 논두렁에 잡석을 깔고 그 위에 올려진 모습이다. 자연 거석의 서쪽 면에 ‘風詠坮 茶山處士(풍영대 다산처사)’라 새기고 다른 곳에는..

창원시 동읍 용강리 오이원효자비와 정려각

용강고개에서 구룡산(九龍山;432.5m) 방향을 보면 구룡산[옛 태을산(太乙山)] 자락 아래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그 아래쪽에 옹기종기 용강리 양달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양달마을 입구인 의창구 동읍 용강리 482번지에는 ‘吳以源孝子碑와 旌閭閣(오이원효자비와 정려각)’이 있다. 이곳은 해발 60m이며 「위도 35°16′18″N 경도 128°38′07″E」이다. 처음 오씨효자비는 화강암으로 된 것이었으나 그 옆에 문중에서 새로 세운 비석이 있으며 그 뒤로 정려각이 있다. 비의 정면에는 ‘孝子贈童蒙敎官吳以源之閭 上之三十二年十二月命旌(효자증동몽교관오이원지려 상지삼십이년십이월명려)’로 음각되어 있다. 비석의 내용은 효자 오이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부친 오태성이 나무를 하러갔다가 범에게 물려 상처를 입었다...

동읍 금산리 강씨부인 효열문

의창구 동읍 금산리 산 41-8에는 “東邑 琴山里 孝烈門(동읍 금산이 효열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동읍 금동마을 버스정류소에서 봉강리 방향으로 약 650m를 가면 우측 산으로 가는 도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산 쪽으로 가는 농로를 따라 약 70m가면 비석 2기가 서 있는 효열문이 있다. 이 효열문은 방형의 블록담장으로 되어 있고 입구는 양쪽에 판석을 세우고 위에는 가첨석을 얻었으며 가첨석 아래에 오석으로 ‘孝烈門(효열문)’이라 새기고 철재 문을 달았다. 블록담장 안에는 2기의 비석이 서있다. 2기의 비석은 모두 1984년 갑자년에 세운 것으로 비대 위의 이수부분은 두 마리의 용이 엉켜있는 모습을 새겼다. 2기의 비는 크기나 형태가 동일한 모습이다. 효열문에서 앞을 바라보면 주남호 중 산남지가 펼쳐져 있다...